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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발」 시대는 지났다/곽수일 서울대 경영대 교수(경제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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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발」 시대는 지났다/곽수일 서울대 경영대 교수(경제진단)

입력
1991.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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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기업 업종전문화 적극 추진해야우리나라의 어느 재벌기업이 기업이미지를 높이기 위하여 외국잡지에 광고하는 문안을 보면 그 기업은 A부터 Z까지 무엇이든지 생산한다는 것이다. 즉 A는 에어로스페이스(항공산업),B는 바이오테크놀로지(생명공학) 등에서 시작하여 H는 호텔사업이고 M은 마이크로칩(전자분야)이고 Y는 요트사업이고 Z는 제로디펙트(무결점)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재벌기업은 자기들 스스로가 최소한 23개의 업종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경제계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이름이고,앞으로 새로운 업종이 추가됨에 따라 영어 알파벳이 모자랄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고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하나의 기업이 그처럼 거의 모든 종류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탄할 수도 있다. 더욱이 이런 내용의 광고는 단지 그 재벌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어느 재벌기업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30대 재벌기업이 만드는 제품을 생각하여보면 지금 당장 우리 주위에서 눈에 띄는 거의 모든 제품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즉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할 때 쓰는 비누,치약에서부터 입는 옷은 물론이고,먹고 마시는 음식에,집안의 가전제품,더 나아가 출퇴근시에 이용하는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교통수단이 이들 30대 재벌기업에 의하여 생산되어 공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재벌기업들이 이것저것 잡다한 분야에서 제품을 생산하며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우리 기업들의 성장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이제까지 우리 기업들의 주된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국내의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외국에서 기술이나 부품을 일부 도입하여 중급품 수준의 제품을 저가로 생산함으로써 경쟁력을 유지하여왔다. 한 예로 우리나라 전자기기 생산액 중 수입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89년 현재 36.4%로서 겉으로는 우리 상표가 붙어서 국산품 같지만 실제로 그 제품의 3분의1 이상은 외국에서 수입된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생산하는 제품들이 전문적 기술이 요구되는 고급품이 아니었으므로 기업들은 한 업종에 전념하지 않고 여러 분야에 진출함으로써 보다 큰 성장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여건은 과거와 같이 여러 업종에 걸쳐 안일하게 중급품을 저가로 생산하여 성장하는 것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고 있다.

즉 최근에 동남아시아의 태국,인도네시아 등이 급속도로 산업화되면서 우리의 중급품 저가 시장을 잠식해오고 있는 반면,우리는 지난 3년간 임금수준이 2배나 상승하여 가격경쟁력을 급속히 잃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우리나라 컬러TV의 원가를 100으로 하였을 때 동남아시아에서 생산한 일본 TV의 원가는 95로서 일본 상표로서의 고급이미지에 원가마저 우리보다 저렴하므로 우리의 컬러TV 수출에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상된 가격요인에 맞추어 품질을 높이려 해도 일본을 비롯한 선진 외국기업들은 우리에게 중급품 생산에 필요한 기술만을 제공하려 할 뿐,우리가 그 이상의 고급 내지 첨단기술을 요구하는 경우 이를 거절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공장견학마저도 금지하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기업들이 과거와 같이 A부터 Z까지 모든 분야에서 중급품을 저가로 생산하겠다는 타성에서 벗어나 전문화된 기술을 통해 일류기업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할 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정부와 재벌기업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업종전문화 문제는 대기업들이 근시안적으로 왜 우리가 잘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하여 정부가 간섭하느냐고 불만을 갖기보다는 보다 거시적으로 우리 경제와 기업의 장기적 성장의 극대화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수긍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범세계적으로 경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이는 한 기업이 항공산업에서도 세계 최고,전자산업에서도 세계일류,유전공학에서도 세계 일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재벌기업들이 한두 가지의 사업분야를 선택하여 그곳에 기업의 모든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세계시장에서 일등기업이 되도록 경영의 초점을 전환하여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어느 재벌기업이 한두 가지의 전문분야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 분야에서 세계 초일류기업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막대한 투자가 소요될 것이 예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업종전문화에 착수해도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정부가 여신관리를 완화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까지 이를 적극 뒷받침하려는 의욕을 보이고 있으므로 각 기업의 노력여하에 따라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져 있다고 하겠다.

서양 속담에 모든 업종에 기술을 가진 기능공은 어느 분야의 기술자도 아니라고 하듯이,기업도 모든 분야에 참여해서는 결국 어느 분야에서도 일류기업을 만들 수 없다는 자명한 논리를 우리 재벌기업들이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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