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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서 겪은 걸프전/이상석특파원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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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서 겪은 걸프전/이상석특파원 「메모」

입력
1991.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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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 취재를 위해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특파됐던 한국일보 외신부 이상석 기자가 13일 두 달 만에 귀사했다. 이 기자는 지난 1월11일부터 3월11일까지 60여 일 간 암만에 머물면서 이번 전쟁을 커버하기 위해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 등에 함께 특파된 본사 전쟁취재망의 구심역을 맡아 왔다. 전쟁취재를 위해 특파된 한국기자로서는 최장기 체재를 기록한 이 기자는 비록 이라크 정부의 입국비자 거부로 바그다드 취재는 불가능하였지만 『암만에서 걸프전을 취재한 것은 동경에서 한국전을 취재한 것과 마찬가지 상태였다』고 말하고 『화학전의 공포에 짓눌려 지낸 60일은 생애 가장 길었던 나날들이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이 기자의 「전쟁메모」이다.<편집자주> ◎가스전 공포로 짓눌린 60일/머리 위로 스커드미사일 “쌩쌩”/진공청소기 소리 사이렌 착각/떠들썩한 의료진 파견 뒤 현지인들 반한으로 급변

2년 전 아프간 반군을 따라 눈덮인 힌두쿠시 산맥의 지뢰밭을 거닐 때에도 이번과 같은 두려움은 없었다. 그때는 『최소한 목숨만은 건지겠지』하는 희망은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가스전에서 살아남을 장사가 어디 있을까. 개전 초기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이 이스라엘을 때리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던 기자는 심한 무력감에 빠져들기까지 했다.

기자도 인간이다. 그들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이다.

걸프전 발발 며칠 전 암만에 도착한 한국의 한 방송기자는 프레스센터를 찾기 전에 암만 시내의 모스크(회교사원)부터 들러 기도를 마쳤다고 한다. 곧이어 서울에 있는 그의 부인이 백일기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또다른 기자부인은 신경쇠약으로 통원치료를 시작했다고 했다.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서울에서는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종군기자수칙 제1조에는 『생명보다 중요한 기사는 없다』고 돼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마치 『기사보다 중요한 생명은 없다』는 듯 전쟁취재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이번에도 장비라고는 암만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지급해 준 방독면 한 개씩이 고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커드미사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암만의 밤하늘을 가로질러 이스라엘 쪽으로 날아갔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라야 그것들이 화학무기를 싣지 않고 있었다는 뉴스에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암만에 특파됐던 20여 명의 한국기자들은 매일 밤 방독면을 머리맡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이튿날 아침이면 으레 토끼눈을 한 채 호텔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텔종업원의 진공청소기 돌리는 소리만 들어도 사이렌 소리가 아닌가 싶어 머리카락을 곤두세울 정도로 「스커드공포 증후군」이 번지기도 했다.

한국기자들은 때때로 일본기자로 오해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요르단인들은 미국의 「이라크 말살작전」에 뒷돈을 대는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암만 교외에 한 주유소에 들렀을 때였다. 주인이 다가와 문을 열더니 『일본인이냐』며 사뭇 위압적인 자세로 말을 걸어왔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답했더니 『코리아는 미국에 맞서 싸우는 좋은 나라』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이어 종업원을 시켜 아랍커피도 한 잔 내왔다. 우리를 북한사람으로 알고 환대해 준 것이다.

현지어인 아랍어를 몰라서 겪은 낭패감도 적지 않았다.

어느 기자가 무좀에 걸려 약이 필요했다. 약국에 가니 말이 안 통해 할 수 없이 여자 약사 앞에서 양말을 벗고 손짓 발짓을 해서 가까스로 무좀약을 샀을 정도였다. 치질이 아니었던 게 천만다행인 셈이다.

암만 체류중 터져나온 수서스캔들도 한국기자들을 당혹케 만들었다. 『한국기자들은 정부나 기업체로부터 으레 촌지라는 이름의 뇌물을 받는다』는 외신기사가 현지신문에 보도된 뒤부터 얼굴을 아는 외국기자들이 『당신은 얼마나 받았느냐』며 빈정대기 시작했다.

걸프사태에 대처하는 한국정부의 미숙함도 간간이 눈에 비쳐졌다.

이번 전쟁의 승자인 미국 편에 섰던 정부는 결과적으로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할 수 있는 위치가 됐다. 하지만 앞으로 아랍세계를 두루 상대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좀더 세련된 아랍외교가 절실하다. 5백명이 채 안 되는 의료진을 파견하면서 군악대를 동원해서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은 국내소모용으로는 성공작이었을지 모르나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많은 아랍인들을 반한파로 만든 실패작이었다.

암만에서 15년 이상 기업을 운영해 오고 있는 박흥운 주요르단 교민 회장은 난리통에도 현지 공장을 정상운영해 요르단 종업원들로부터 『사담·후세인 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한국인이다.

그러던 그가 한국 의료진 파견 소식이 떠들썩하게 전해진 다음날부터 종업원들로부터 「찬밥대접」을 받게 됐다. 박 회장은 『출근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종업원들이 인사도 않고 얼굴을 돌리더라』고 전하면서 『중동외교는 소문 안 나게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의 복구사업도 마찬가지이다. 조용히 파고 들어 실속을 챙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지공관원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사담·후세인이 왜 그렇게 맥없이 주저앉았는가. 한마디로 세상물정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차제에 정부의 중동정책에도 심기일전이 있어야 한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 전쟁과 함께 걸프전 취재전도 마무리됐다.

지난 2개월간 바그다드에서 걸프전을 생중계했던 CNN TV의 피터·아네트 특파워는 지난 9일 암만으로 빠져나온 직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구출된 느낌』이라는 말로 취재기를 마감했다.

정확하게 2개월 이틀 동안의 걸프전 취재에서 돌아온 나의 소감도 아네트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오랜만에 아내가 만든 열무김치를 먹고 주현미의 노래를 다시 들으니 이제는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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