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방조약」 반대 넘어/“독재자 전락” 실망표출/보·혁 불신 깊어 정치적 전망 “오리무중”지난 10일 모스크바를 비롯한 소련 전역에서 벌어진 반고르바초프시위는 11일로 집권 6주년을 맞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모스크바에서 20만∼50만,레닌그라드 7만,옐친의 고향인 스베르드로프스크 5만,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와 르보프시에서 각각 7만 여명이 참가한 이날 시위는 17일로 박두한 신연방조약안에 대한 개혁파의 「세과시용 집회」의 차원을 넘어서 반고르바초프의 성격을 분명히했기 때문이다.
크렘린궁 인근 마네츠광장에서 벌어진 이날 시위에서 가브릴·포포프 모스크바시장은 이번 국민투표를 고르바초프에 대한 신임과 연계시킬 것을 주장했고 보리스·옐친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은 녹음연설을 통해 『고르바초프가 「거짓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맹공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가늠할 신연방조약안 국민투표를 앞두고 급진개혁파에 대한 일련의 유화제스처를 취했다. 8일 공개된 신연방조약안은 군사·외교 등을 연방의 권한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해 마련된 초안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만 군사·외교 등에 관한 정책결정 과정에 공화국 대표들을 참여시키기로 하는 등 공화국의 발언권을 보다 강화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또한 외교 국방정책을 비롯,법과 질서유지문제를 다룰 안보위원회 위원에 대표적 개혁파인 바딤·바카틴 전 내무장관을 포함시킨 것 등도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보수화경향에 따른 급진개혁파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스처만으로 급빈개혁파를 무마시키기에는 고르바초프에 대한 급진개혁파의 불신의 골은 너무 깊어졌다.
급진개혁파의 기수인 보리스·옐친은 9일 크렘린과의 정치적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고르바초프의 일련의 유화제스처를 일축했고,급진개혁파 세력은 바로 다음날인 10일 전국에 걸쳐 대규모 반고르바초프집회를 벌임으로써 옐친의 선언에 호응했다. 급진개혁파 세력은 지난해 12월 이후 현저해진 고르바초프의 강경선회가 향후 수년간 계속될 경제혼란에 대비,법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전술적 후퇴」를 한 것뿐이라는 호의적 해석을 거부한 것이다.
개혁파들은 고르바초프가 이미 보수파와 손을 잡고 독재자로 전락했다는 비관적 분석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 10일의 대규모 시위로 명백해진 것이다. 아발킨,야코블레프,샤탈린,페트라코프 등 개혁파의 중심인물들을 정치의 중심권에서 밀어내고 이바시코,아나예프,보리스·푸고 등 강경 보수파들을 요직에 등용한 것 등도 자극제가 되었지만 급진개혁파는 보수파에 대한 유일한 반격창구인 언론의 목을 고르바초프가 죄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10일의 시위에서 급진 개혁파들은 고르바초프를 사담·후세인에 빗대 「사담·고르바초프」라는 플래카드를 내세웠는가 하면 「고르바초프 없는 소련을 원한다」는 구호도 등장,고르바초프에 대한 실망감의 정도를 짐작케 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에게 있어 더욱 설상가상인 것은 우크라이나,시베리아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이다.
모스크바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던 10일 우크라이나의 석탄노동자 지도자들은 1백50%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촉구하고 나섰고 소련북부의 보르쿠타지역에서는 13개 광산 중에서 6곳이 파업중이다.
우크라이나 돈바스지구와 시베리아 쿠즈마스지구에서 간헐적으로 전개된 파업으로 이미 10만톤 이상의 생산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정부당국은 밝히고 있다.
고르바초프에게 있어 신연방조약안 국민투표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소연방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난제인 민족문제에 대한 자신의 정책을 국민으로부터 인준받아 백화제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민족문제토의를 종결시키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신연방조약안 국민투표를 채 일주일도 남겨놓지 않은 현재 15개 공화국 중 7개 공화국만이 이에 동의하고 소연방의 중추를 이루는 러시아공화국을 포함한 8개 공화국은 거부하고 있다.
또한 옐친 등을 포함한 급진개혁파세력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반고르바초프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17일 신연방조약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이를 통해 민족문제를 일단 잠재워보려고 한 고르바초프의 계산은 빗나가 버린 것으로 판단된다.
10일의 대규모시위는 한때 개혁동료였던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분열을 보다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기반과 소련의 앞날이 더욱 불투명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유동희 기자>유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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