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중 「24시간 통금」 시달려/백70만명 생활 엉망진창/방독면도 일부에만 지급/차별 극심… 차 번호판색 달라/“화해 불가능” 무장투쟁 지지요르단의 수도 암만 변두리에 있는 알 와이다트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살고 있는 무하마드·하산·사예드씨(66)는 걸프전이 진행되는 동안 이라크가 이스라엘에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가하는 광경을 보면서 42년 동안 보관해온 토지문서를 모처럼 꺼내 보았다. 이 토지문서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둘러싼 1차 중동전 기간중 그가 고향인 이스라엘의 알 압바시야에서 요르단강 서안지역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소유하고 있던 2만㎡의 농장 토지문서이다.
당시 아내와 두살된 아들과 함께 소규모 농장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던 사예드씨는 이스라엘군이 텔아비브시 북부에 있는 이 마을을 공격하는 바람에 농장과 모든 재산을 놓아두고 요르단강 서안으로 달아나야 했다.
사예드씨 가족은 이스라엘 영토를 벗어나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알잘라존이란 난민촌에서 1만5천여 명의 난민들과 함께 견디기 어려운 피란 생활을 시작했다.
유엔의 전쟁난민 구호기구인 UNWRA가 지급한 텐트와 끼니를 이을 수 있을 정도의 식량 만이 그들이 가진 것의 전부였다.
사예드씨는 이 산악지역에 위치한 난민촌에서는 더이상 미래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54년 암만으로 이동,지금 살고 있는 알 와이다트 난민촌에 정착했다. 그러나 알 잘라존 난민촌에 남아 있던 팔레스타인인들 67년 3차 중동전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하는 바람에 또 다시 요르단 등지로 쫓겨나야 했다.
알 와이다트 난민촌은 67년 이후 새로운 난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더욱 규모가 커졌고 그후 24년이 지난 지금은 암만 시내 다른 지역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시가지로 변해 버렸으며 상술에 밝은 사예드씨는 조그만 옷가게를 경영할 만큼 형편이 나아졌다.
그러나 사예드씨가 팔레스타인인들의 비극과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 70년 요르단에서 벌어진 이른바 「검은 9월」 사건으로 당시 20살의 나이로 팔레스타인 게릴라 활동을 하던 3남 하산을 잃은 불행을 겪었다.
또한 사예드씨의 넷째 아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내에서 「파타」에 이어 두번째의 무장투쟁 조직인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LO)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다가 8년 동안 요르단에서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죽은 3남을 제외하고도 7남 4녀를 두고 있는 사예드씨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과 맞서 싸울 힘을 키우기 위해 자녀를 많이 낳는 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67년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지구 등에 사는 1백7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외부인들이 상상키도 어려운 탄압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의 수난은 특히 이번 걸프전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극심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라크에 동조 「제2전선」을 구성할 것을 우려,유엔이 정한 이라크의 쿠웨이트철군 최종 시한이었던 1월15일부터 전점령지를 대상으로 67년 이후 가장 가혹한 통금령을 실시했다.
이번 통금은 대부분의 기간이 24시간 전면 통금이었고 중간 중간에 3∼6시간 동안만 통금을 해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일을 하러 나갈 수도 없으며 음식을 구하러 갈 수도 없어 생활의 모든 기능이 완전 중단됐다.
물자공급이 중단돼 가게 진열대는 텅텅 비었고 일부 남아 있는 물건들은 썩어 못쓰게 됐으며 통금이 해제 된 후에도 일을 못 나갔기 때문에 물건을 살 수 없는 악순환이 꼬리를 이었다.
점령지구내 모든 팔레스타인 대학은 지난 88년 부터 폐쇄됐다. 이유는 87년 12월부터 점령지구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비무장투쟁인 인티파다(봉기를 뜻하는 아랍어)가 시작됐고 대학이 투쟁무대가 됐기 때문이다.
한 팔레스타인 노동자가 교통사고로 숨진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가 발단이 돼 전 점령지로 번진 인티파다는 억눌려온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의지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됐고 그들의 수난상을 외부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3년 이상 계속돼 온 인티파다로 7백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하고 6만명 이상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티파다가 격화되면서 이스라엘 군의 보복과 탄압도 그만큼 가혹해졌다. 이스라엘군은 자신들에게 공격을 가한 혐의자를 발견할 경우 당사자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보복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가 가족들을 몰아내고 다이너마이트 등으로 집을 폭파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당국은 인티파다에 가담하거나 비밀지하활동에 관련됐다고 판단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영장도 없이 체포,투옥시키고 있다. 이스라엘당국은 「행정감금」이란 제도를 이용,누구나 재판없이 최고 2년까지 투옥시킬 수 있으며 2년이 지나도 무기한 연장이 가능하다.
나블러스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인 변호사 하산·사카씨(48)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범죄 혐의자를 체포하더라도 혐의사실을 비밀로 취급하기 때문에 변호자체가 불가능하며 당사자도 어떤 혐의로 자신이 체포됐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요르단강 서안에서 활동하는 6백여 명의 팔레스타인인 변호사중 3백명은 지난 67년부터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안 점령에 항의,지금까지 변호사업을 중단하고 파업을 벌이고 있는데 사카씨는 이 변호사 파업위원회의 대표자중 한명이다.
이스라엘내 팔레스타인인들은 또 노골적인 차별을 받으며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은 색깔에 따라 거주지역을 표시하는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고 다니면 즉시 체포되며 심지어 자동차 번호판도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은 다른 색깔을 사용하고 있다.
이번 걸프전쟁 중 화학무기 공격위험에 시달려온 이스라엘인들은 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스마스크를 무료로 지급해 주면서도 점령지구에는 이스라엘 기관에 일하는 극소수의 팔레스타인인을 제외하고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이같은 가혹한 점령정책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과의 화해 가능성을 부정하고 극단적 투쟁으로 기울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암만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사령부파(PFLP·GC)의 비밀조직을 이끌고 있는 타미미씨(29·가명)는 『이스라엘과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권리를 되찾는 길은 무장투쟁 뿐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야세르·아라파트 의장의 온건노선에 반발,PLO와 결별한 이 조직은 레바논에 수천 명의 게릴라 부대를 두고 최근 이스라엘에 활발한 게릴라 공격을 시도한 강경파 세력이다.
지난 67년 3차 중동전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참상을 보고 투쟁에 나섰다는 타미미씨는 『우리 조직이 가장 강력한 무장투쟁을 했기 때문에 78년 가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역시 70년 「검은 9월」 사건으로 요르단당국에 체포돼 8년간 투옥생활을 했다.
이 조직의 일원인 아민양(20·가명)은 가족이 암만과 요르단강 서안도시 헤브론에 떨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이다. 이들 가족은 원래 헤브론에 살았으나 67년 전쟁 당시 부친이 암만에 나와 있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본의 아닌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현재 부친과 아민양은 암만에 살고 있으며 헤브론에는 모친과 오빠가 살고 있는데 1년에 한번 정도 상호 방문,전가족이 재회한다.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당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주로 요르단과 레바논·시리아 등 인접국에서 고단한 더부살이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UNWRA에 등록된 난민은 2백50만명 정도로 이중 85만명이 집단 난민촌에서 생활하고 있다. 전세계에 살고 있는 4백50만명의 팔레스타인인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숫자다.
팔레스타인 난민이 가장 많은 곳은 요르단으로 93만명이며 이중 23만명 정도가 10개 난민촌에 몰려있다.
요르단강 서안과 인접한 요르단에서 난민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이번 걸프 전쟁으로 쿠웨이트와 이라크 등에서 30만명이 새로 유입됐다는게 요르단 정부의 설명이다.
석유도 나오지 않는 아랍 빈국인 요르단으로서는 이들 난민들이 경제적으로 엄청난 짐이 되고 있다. 이미 1백만 명을 넘어선 난민에 쓰이는 자금은 매년 요르단의 예산 8천만 달러와 UNWRA 지원기금 5천만달러 등 1억3천만달러 정도가 고작이다.
요르단 외무부 산하 팔레스타인 지원부 공보국장인 압둘·카림·아브알하이자씨(40)는 『걸프사태로 30만명의 난민이 갑자기 늘었으나 유엔 지원기금은 매우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라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물론 등록된 난민들이 모두 생계를 잇지 못할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인들 중에서도 근면하고 재능이 많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인은 「아랍의 유태인」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다른 아랍인들이 내심 경계하거나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취업이나 승진 등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당한다고 주장한다. 요르단에서는 팔레스타인인에게도 원할 경우 시민권을 주지만 군·정부요직 등에 진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요구는 갈수록 강해질 수밖에 없다. 사예드씨는 『나는 수십억 달러를 준다해도 조국을 포기할 수 없다』며 『희망이 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나는 언젠가 조국을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3년 동안 날로 강화되는 이스라엘의 탄압 외에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과 분노가 날로 깊어지고 있다.<요르단강 서안(이스라엘)="배정근" 특파원>요르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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