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불가」한 번쯤 읽은 기억이 남는 창작극의 제명이다. 얼핏 제목만 보아선 무슨 뜻인지를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찬찬하게 뜯어 읽으면 마치 껌을 씹듯 은유적인 맛이 우러난다.이 제명은 띄어쓰기에 따라 뜻이 확 달라진다. 불가라고 두 자씩을 묶으면 하나의 의미가 확실하게 떠오른다. 불가,불가로 띄어쓰기를 할 때 절대 안 된다는 부정이 동어반복으로 강조된다. 불가불 세 글자를 묶어서 띄어쓰면 불가불 가로 뜻은 영 틀리게 나타난다. 불가불을 사전에 있는 대로 옮겨 적으면 「아니 되어서는 안 되겠으므로 마땅히」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띄어쓰기에 따라 상반되는 불가불가의 제명을 하나의 같은 현상에 적용하면 전연 다른 결론이나 결정을 도출하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불가는 문자 그대로 옳지 않다는 직선적인 부정의 표현방법이다. 불가불 가는 어쩔 수 없이 옳을 수밖에 없다는 간접적인 왜곡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불가를 수서사건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은 평면적인 풀이가 가능하다. 이 사건은 근원을 따져들면 원칙으로 불가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가불가의 항변은 모기 소리처럼 약하기만 하였다. 왜 그랬을까. 불가불 가로 하자는 공세가 치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고위층,관련관청,정당,정치인들이 힘을 합쳐 불가불을 내세워 불가를 가로 몰아붙인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외압이라 해도 무방할 줄 안다.
「아니 되어서는 안 되겠으므로 마땅히」 저질러놓고 난 결과가 세상을 들끓게 만들었다. 그런데 파문의 뒤처리가 불가불가로 뒤엉켜 버렸다. 관련당사자들은 처음엔 대개 무혐의를 주장하고 변명에 급급하였다. 감사와 수사로 전모가 차츰 밝혀지기 시작하자 불가불이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원칙상의 불가는 좀체로 시인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검찰의 수사과정이나 해명 또한 명쾌하지 않다. 따라서 정부가 아무리 불가불을 애써 강조하여도 불가의 불만과 노여움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문책과 쇄신의 개각이 있었고 놀랍게도 5공비리에 대한 특사가 내려졌다. 문책의 강도는 느끼기 어렵고 쇄신은 기대조차 않는 냉랭한 반응은 불가불가를 제대로 풀지 못한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수서의혹은 6공이 빚어낸 단순한 돌출사건은 아닐 것이다. 파문과 분기는 그 구조적인 형태 때문에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부패 비리 부조리는 응당한 단죄와 청산이 없었기에 그 고리가 단절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들녀석이 친구의 책을 훔쳤다. 어머니는 꾸짖지 않았다. 다음엔 남의 옷을 훔쳤다. 이번엔 어머니가 칭찬을 해주었다. 그 아들은 나이가 들어 큰 도둑이 되어 끝내 형장에 끌려가게 되었다. 뒤늦게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따라갔다.
형장에 가는 도중 아들은 할 말이 있다고 어머니를 가까이 불러 갑자기 귀를 물어뜯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이때야 비로소 크게 꾸짖었다. 아들의 대답이 기가 차다. 「처음 책을 훔쳤을 때 나를 지금처럼 꾸짖었다면 오늘 나는 형장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아무리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비리,그 중에서도 권력형은 근원에서 봉쇄함이 긴요하다. 즉 원칙이 바로 세워지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이 확고하면 정치나 공직사회에서 불가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마련이다. 불가불의 왜곡이 우악으로 통하는 한 정치나 행정의 논리는 무너지며 이런 풍토에서 윤리의 싹이 터오르길 기대하기 어렵다.
부정과 비리의 뿌리를 한 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쉽게 타협한 결과가 재발을 쉽게 하고 당당하게 대응할 수 없는 불행한 현실을 초래한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수서사건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으나 그 효과가 실제로 발휘될지는 의문이다. 해명과 처리는 불가불로 끝난 셈이며 해결과 수습의 방책에 대해선 불가의 여론이 계속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6공을 이끄는 노 대통령은 취임 3돌을 역경에서 맞는다. 깨끗한 정치,깨끗한 정부,깨끗한 사회에의 의지가 공허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의 역경을 불가불의 탓으로 밀려는 타성을 추방하는 결단과 의지가 요구된다.
남은 임기중엔 불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과거와의 차단을 과감하게 단행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가불가의 울림이 넓게 퍼지도록 오히려 그 부정의 힘을 키워가야 한다. 창조의 논리와 윤리는 강한 부정에서 잉태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물론 험로일 것으로 예상된다.<논설위원>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