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중 책을 한 권 샀다. 제목은 「사슴이 머무는 곳」(Where the Buck Stops)89년에 나온,미국의 제33대 대통령 해리·S·트루먼(1884∼1972)의 유고집이다. 책을 편집한 트루먼 대통령의 외동딸 마거릿 여사는 그가 퇴임직후부터 이 책의 내용을 가족과 비서들에게 구술해 왔으며,저자 부부가 다 세상을 뜨기 전에는 출판하지 말 것을 당부했었다고 밝히고 있다.「사슴이 머무는 곳」이라는,얼핏 듣기에 시적이기도 한 책 이름에 대하여,책의 편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그 책이름이 미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관용구에서 연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약간의 해설이 필요할 것도 같다.
개척시대 미국의 서부를 누볐던 사나이들에게,사슴은 매우 고마운 동물이었다. 그 고기는 식량이 되고,가죽은 옷감이 된다. 그 뿔로는 사냥칼 자루를 만든다. 「사슴이 머무는 곳」의 사슴은 바로 사슴뿔로 자루를 해박은 이 사냥칼을 이른다.
서부 생활에서 이 칼의 쓰임이 요긴한 것은 말할 것이 없지만,그것은 포커 도박판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소도구였다. 포커 테이블 위에 이 칼을 놓아 딜러가 누구인지를 알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슴이 여기 머문다」(The buck stops here)는 말은 「내가 딜러다」라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내가 이번 판의 주인이다」 「결정은 내가 한다」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이 파생한다.
생전의 트루먼은 「사슴은 여기 머문다」는 말을 즐겨 썼다. 그 한 마디가 그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인생철학,통치철학을 가지고 그는 일본에의 원폭투하,마셜 프랜과 트루먼 독트린 등의 냉전전략,한국전쟁 참전 등의 큰 일을 결단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대통령 재임 당시에 비하여,갈수록 높아지는데 까닭이 없지 않은 것이다. 수정주의 사가들이야 무슨 말을 하건,그의 책임감과 결단력이 30여 년 냉전의 향방을 결정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그의 유저 제목이 말하는 「사슴이 머무는 곳」은 모든 국정의 결정권과 책임이 귀속되는 곳,곧 대통령의 직위와 권한을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증경 대통령이 쓴 대통령론이란 것이다.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론이란 것만으로도 이 책은 관심을 끌만 했지만,나에게는 그것 말고도 이 책을 집어 들 만한 까닭이 있었다. 지난 87년 대통령선거 때,지금의 노 대통령 이름으로 발간된 책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가 대통령의 이상형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꼽았던 일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책의 서술을 빌리면 트루먼은 재임중 시골뜨기란 혹평을 듣기도 했으나,「주어진 상황에서 성실하고 겸허하게」 일함으로써 훌륭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한결 더했고,그것이 여행중 묵직한 책 한 권을 사들게 한 또 다른 까닭이 된 것이다. 이 책을 읽어 우리 대통령을,또 그의 통치스타일을 좀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뒤의 한 가지 결론은,「위대한 보통사람…」의 저자는 그냥 트루먼을 들먹였을 뿐,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근래 수서사건와중의 그를 보아서는 더욱,그 통치스타일은 트루먼의 대통령론을 거꾸로 따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대통령론은,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보통 사람」(ordinary man)에 불과하며,나라를 위해 일할 생각이 있으며,그렇게 할 만한 행운을 만난 사람일 뿐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 점만큼은 우리 대통령의 표방과 어느 뜻에서 상통한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훌륭한 대통령」은 몇 안 되고 「없어도 좋았을 대통령」은 많다. 그 갈림은 대통령의 자리가 「사슴이 머무는 곳」임을 알고 노력하느냐,그렇지 못하냐에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점이다.
이 점을 강조하여 트루먼은 4부로 나누어 쓴 책의 제2부에서 「훌륭한 대통령의 조건」을 집중해 거론하고 있다. 그가 여기에서 하고자 한 말은 제2부를 구성하는 각장의 이름 즉 ①결심 ②집착 ③듣기와 설득력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모든 장에 공통되는 주조는 어디까지나 「강한 대통령」 「강한 지도력」이다.
그에 의하면 『대통령은 스스로 작심할 수가 있고 이견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엇을 이루려는 대통령은 결단을 내려야 하며,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대통령은 분란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또 그에 의하면 대통령은 『그의 역할을 법의 관리자로 스스로 한정하여 지도자이기를 그쳐서는 아니된다』 『그는 (나라의) 지도력을 제공해야 하며,프로그램이 있어야 하고,이를 실행할 배짱(guts)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능력은 국회와 국민을 설득하는 힘이며 국민들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바로 「사슴이 머무는 곳」이란 책 이름의 뜻이다. 이 뜻을 모르는 대통령을 만났을 때 나라가 위태로워 짐을,저자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동원하여 논증하고,거듭 강조한다. 남북전쟁(1861∼1865)과 대공황 직전이 그랬다는 것이다.
별로 심오할 것은 없는 결론이지만,우리의 오늘을 보아서는 시사하는 바가 제법 큰 내용이다. 총체적인 파국을 걱정해야 하는 이 땅의,「사슴이 머무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6공 3주년을 앞두고 던지는 이 물음 자체가 좀 참담하기는 하지만,자위를 겸해 트루먼의 말중 다음 두 마디만은 더 인용했으면 한다.
『위기는 나라를 위해 이로울 수가 있다. 어떤 대통령은 위기가 아니면 지도력을 발휘하지를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결단은 당장에 내려져야 한다. 그 결단은 뒤로 미룰 수가 없기 때문에』<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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