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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91년 주제/투표혁명을 이루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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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91년 주제/투표혁명을 이루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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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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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된 시민의식을 믿는다”/「한표」 행사 후 기억상실증 문제/중산층 침묵아닌 파수꾼역을/지역갈등도 정치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야○신세대의 「조용한 혁명」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 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나는 주저없이 대답한다. 『그렇소. 나는 사회주의자요』 그리곤,잠시 주저한다. 나를 폭력주의자로 질타하려는 듯한 그의 근심어린 표정이 나의 대답에 제동을 건다. 아니지,나는 사회민주주의자이지. 그리곤,다시 망설인다. 문벌과 지역연고와 파벌로 휘청거리는 한국의 정당정치에서 무슨 사회민주주의의 꿈을 아직도 꾸고 있는가? 아니지,나는 혁명에의 희망을 저버린 한낱 직장인에 불과하지. 그러나,유신과 5공의 어두운 정치의 갈피 속에 남아 빛나고 있는 우리의 오기가 가벼운 포기에 제동을 건다.

그래도 우리의 젊은 세대는 살아 있다는 것,그리하여,권위주의로 위장한 자유민주주의는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이며 자본주의의 숨은 모순을 치장하려는 이데올로기임을,잘사는 사람이 한가한 기지개를 늘어지게 켤 동안 못사는 사람을 병상에 눕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임을,우리에게 자유란 자본가의 자유이며 민주란 권력자의 민주이었다는 사실을,그래서,그것은 결국 우리의 <잘못된> 친구임을 확인한다. 그것은 이제 가서는 안 될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여전히 그 자유와 그 민주를 부르짖는 정치삼류국의 그 철없는 정부권력자와 정치기사들에게 이제는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 동안 젊은 세대는 추하게 늙고 있는 그대들을 은퇴시킬 <조용한 혁명> 을 준비해왔다.

○정치는 사회건축 예술

브란덴부르크광장에서 열광하는 독일국민의 축제를 보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한국국민은 없다. 정치가 사회변혁을 일구어내는 예술이라면,독일의 정치가들은 세기의 예술가이다. 사회주의체제가 서독의 막강한 자본력에 팔려갔다거나,동구권이 자체 재조정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등의 문제를 여기서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다만 무너지는 베를린장벽 앞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노음악인의 감격이 절실할 따름이다. 정치는 사회건축의 예술이다. 한국의 정치는,그러나,불협화음과 분노와 부실공사를 연출하는 변사의 억지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국회에서 통과되는 법안은 우리의 희망을 돕지 않는다는 것과,책임과 윤리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정치인의 자격에 미달된다는 것과,그리하여,우리는 투표권한의 행사를 통하여 스스로 사기극의 공모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정치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무식과 폭력> 에서 나오며,정치인은 사회변혁에의 열망보다 권력유지의 논리를 우선 터득해야 하는 것이 비극의 기원이다.

○시민참여 시대적 과제

이 시대의 비극은 분단도 종속도 악화된 분배구조도 아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비극은 젊은 세대의 신선하고 확신에 찬 꿈을 기성세대가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데에 있다. 1980년대를 돌이켜보건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고 살아 있는 젊은 층을 보유했던 한국이 민주화열망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개혁에의 욕구를 <위험한 장난> 으로 몰아세웠던 추악함은 모두 기성세대의 좁은 식견과 초조함 탓이다. 이것만으로도 기성정치인들은 단죄를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그들은 듣기조차 이제는 역겨운 그 말과 그 작태를 반복한다. 지도력의 원활한 재생산은 정치의 안정적 발전에 필수적이다. 그러나,후계자를 조기에 숙정했던 유신정권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서둘러 차단한다.

민주정치는 중간집단 혹은 자발적 시민집단의 정치참여를 기초로 한다. 그러나,선진대열의 문턱에서 산업민주주의와 노사화합만을 선전하면서 천만 명 노동자의 이익집단인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정치불안정의 명분으로 기필코 분쇄한다. 1979년,1980년,1987년을 통하여 시민의식은 성장했다. 기성정치인들은 그들이 우리들의 합의를 주도하던 시대는 끝났으며,대신 의사결정과정에 시민들을 초대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권력행사자로부터 권력에의 초대자로의 역할변화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념결핍증,부도덕,무지에 대한 80년대의 시민적 저항은 이제 거리에서 데모나 전경련과의 부질없는 충돌 따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성숙된 모습으로 모든 사회집단에 확산되고 내면화되었다.

그러나 기성정치인들은 강요된 안정과 질서 뒤에서 진행되는 조용한 혁명의 모습을 모른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우리를 고독하게 만든다. 지난 시대의 고통과 잘못을 이 시대의 새로운 신념과 확신으로 속죄하려는 사람은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이 고독 속에서 시민들은 거짓된 이데올로기와 대항할 수 있다. 그러나,한국의 삼류정치술은 시민을 진정한 고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에는 가히 전문적이다.

○경제에 함몰된 민주화

기억상실증­1987년 6월의 시민항쟁은 이제는 먼 기억이 되었다. 민주화열망은 경제불안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었다. 4년 전 재야의 저항을 범시민적 항쟁으로 승화시켰던 중산층은 공안정국,노동탄압,3당합당,그리고 독재로의 회귀를 침묵으로 묵인한다. 아니면,경제안정을 외치는 권력합리화의 술수에 공모한다.

<중산층의 반역> 은 기억상실증의 전형적 징후이다. 민주화란 자유민주주의의 강화라는 이데올로기에 자율적으로 수용되면서,우리의 중산층은 분배구조의 악화를 비판하고 불법선거에 분노하고 노사분규에 증오를 보낸다. 그리고 돌아서서 아파트값이 오르기를,지배정당의 후보가 당선되기를,생존에 충혈된 노동자가 공장의 기계에 매달려 있기를 고대한다. 기억상실증은 고독을 회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지방자치제가 드디어 바라던 민주주의의 실현인 것처럼 들떠 있다.이승만 정권 때의 지방자치제의 폐단을 기억하지 않는다.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의 시작이라는 사실의 이면에는 독재정권의 유지에 기여하는 또 다른 우울한 진단이 숨어 있다. 우리의 선량이 정당정치 속에서 어떻게 탈바꿈하였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문제는 정치가의 자질이기도 하지만,그들에게서 품위를 빼앗아버리는 정치판의 생리에 있다.

권위주의의 세계적 전형인 한국이 언제 양당체제의 민주주의를 저버린 적이 있었던가? 뽑혀서는 안 될 사람을 아무리 골라 보내도,선수끼리 담합하면 아수라장이 연출될 뿐이다. 그래도 몇 번의 기억상실증 속에서도 이제 우리는 <진정한 시민> 이 되자는 신념과 합의의 기반을 확대시켜왔다는 사실에 기대를 건다.

○기대 못 미친 자치권한

봄부터 몇 차례의 중대한 선거를 치를 예정이다. 지방의원선거,내년의 국회의원선거,그리고 다음의 대선. 과거가 좀 캥기는 사람은 나서지 말 것,돈 뿌리는 사람은 나서지 말 것,정치꾼들은 나서지 말 것,지방색을 강화하려는 자는 나서지 말 것,민주주의란 뭐 그런거 아니냐고 쉽게 해치우는 술수 좋은 자도 나서지 말 것. 그런 사람은 <뽑지도> 말 것­이런 유의 구호로 가득 메워질 이번 봄을 생각하면 지레 가슴이 답답해진다.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

우선,지방자치제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볼 일이다. 지방자치는 중앙집권력을 강화시킬 수도 약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중앙집권적 전통이 강했던 대륙형적 제도에 속하는 한국의 지방자치는 여러 가지의 제한 조건을 명시한 현행법하에서 중앙집권력을 강화해줄 개연성이 불행히도 크다. 프랑스의 드골은 일사분란하게 성장하는 정치적 도전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지방자치를 이용했다. 현정부가 지방의회에 허용한 자치권한은 복지업무를 벗어나지 않는다. 기초자치단체와 정당의 관계를 끊어놓는 식의 치졸함으로는 지방의회는 대화술의 수련장이 될 공산이 크고,따라서,우리가 들떠 있는 『풀뿌리민주주의』의 기대에 못미친다. 화려한 공약으로 당선된 의원이 잦은 회의출석에 짜증을 내는 상황이 곧 도래할 것이다. 지역갈등을 완화시킬 것이라는 정치권의 논리는 사실상 이런 취약한 자치제하에서는 지역갈등의 정치쟁점화를 분산시키려는 선전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동원될 지방의원선거는 지배권력의 성공적 재생산에 기여할 우려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우리의 민주열망이 지방자치제의 흥분으로 잠식될 것이다. 지방자치제에 의한 권력분산은 개혁의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놓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방화되는 동안 중앙을 차지하는 지배권력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쉴 것이다. 소득정책과 복지정책은 사기업의 입김이 작용한 희미한 형태로만 나타날 것이다. 본질적으로,지방의회는 정치학교이다. 그것을 통하여 미래의 지도자가 성장한다. 지방의회가 정당운영에 쇄신의 압력을 가하고 권력자에게 책임윤리의 실천을 강요하는 정치의식의 도량역할을 하지 못하면,투표권한의 행사 자체가 무의미할는지 모른다. 마치 1987년의 대선이 우리의 열망을 스스로 배반한 것처럼,민주열망의 파수꾼은 괜히 들떠 있는 선거열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투표를 통하여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 시대의 비극을 끝막음하고 우리의 고독을 지켜줄 미래의 지도자는 나의 한 표로 성장할 것이다.

○권위주의 청산 계기로

갈등이 없고 합의만 제조되는 사회는 전체주의와 다름없다. 한국정치의 가장 큰 폐단을 지역갈등이라 하지만,선진국인 이태리는 우리보다 더욱 심한 지역갈등을 겪었다. 프랑스는 종교분쟁,독일은 계급갈등이 정당정치의 기반을 이루었다. 지역갈등은 고도산업화와 권위주의정권의 나쁜 산물이지만,그것을 근대적 정당정치로 연결시키지 못한 것은 또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이들은 지역주의 덕분으로 권력에 합류하였으면서 겉으로는 그것이 부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스스로 자살을 원하는 꼴이다. 정치발전을 가속시킬 다른 원동력으로 전환시키는 대신,우리의 허락도 없이 3당합당을 감행했다. <시민의식> 은 정치적 경제적 조건의 혁신을 통하여 지역갈등을 정치발전의 건전한 원동력으로 전환시키려는 의욕이다.

지역주의의 폐단을 들먹이는 모든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그 뒤에 무엇인가의 음모를 숨기고 있음을 깨닫는 일,그것이 시민의식이며,결국 선거혁명의 촉진제가 된다. 다시 강조하건대 정치는 시민과 공모하는 거대한 시기극이라는 한국적 등식에 우리의 비극이 있다. 그 깨달음으로부터 우리는 지금 민주화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지방자치제는 권위주의로 점철된 현대사의 얼룩을 말끔히 지울 수도 있다. 독일국민의 축제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젊은 세대의 지성적 도전과 모험이 개화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그것이 사회주의이든,사회민주주의이든,혹은 제3의 어떤 체제이든 이웃사람의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수도 있다. 지난 시대의 권위주의가 바뀐 모습으로 재현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만 하다면,이제는 진정한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기만 한다면,그리하여 「조용한 혁명」을 이루어내기만 한다면.

□송호근(한림대교수)

▲필자약력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하버드대학 대학원 졸업(사회학박사)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 △주요저서 「지식사회학」(1989) 「한국노동정치와 시장」(1991) 「노동과 불평등」(편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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