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포성·섬광… 방공호서 밤샘/며칠전부터 탈출계획… 바스라 직원 합류/현지인 소개로 바쿠바 양계장으로 이동/냉동식량등 준비… 대사관 접촉 안해 출국지연 불안8일 동안 「사지」인 이라크에서 대피생활을 하다 31일 하오 귀국한 현대건설 직원근로자 등 9명은 이라크를 탈출할 때 박휴중씨(35)와 결혼한 이라크 여인 모나씨(35)의 도움이 컸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쟁이 날 때까지 이라크에 남아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자원한 것』 『별다른 위험을 못 느겼다』고 말할 뿐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바그다드 사업본부장 김종훈 이사대우(49)가 김포공항 도착 직후 밝힌 탈출경위와 바스라현장 기술부장 김무웅씨(48),바그다드 사업본부 인력부의 여권업무담당 김효석씨(36),바그다드 사업본부 직권 백종호씨(29) 등이 집에 도착한 뒤 증언한 탈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전쟁 전=바그다드 사업본부 직원 11명은 전쟁발발 전날인 16일의 작업이 늦게 끝나 이폭관사에서 맥주를 마시던중 17일 상오 2시30분께 요란한 대공사격 포성이 들리면서 하늘에 시퍼런 섬광이 번쩍거려 전쟁이 난 것을 알았다.
바스라현장의 2명은 14일께부터 현지인들이 피란을 시작함에 따라 탈출계획을 짜고 바그다드에서 북동쪽 70㎞인 바쿠바로의 탈출경로를 답사했다. 한국으로의 탈출예정로는 바쿠바→카나킨(바쿠바에서 1백10㎞ 거리인 국경도시)→이란의 코스라비→바크다란→테헤란이었다. 바스라 해군기지 현장과 알무사이브발전소 현장직원들이 16일 바그다드로 집결,전쟁발발 당시 사업본부에는 모두 14명이 있었다.
▲17일=폭격 속에 단파방송 BBC 모스크바방송 등을 틀었으나 아무것도 안 나와 포기한 직원들은 상오 3시께 방공호로 들어가 모포를 덮어 쓰고 첫날 밤을 보냈다.
단전·단수된 사업본부에서 아침을 라면으로 때운 이들은 알무사이브에 혼자 있었던 임풍호 차장(40)과 친한 현지인(40대)이 60㎞ 떨어진 바쿠바에 있는 자신의 양계장을 소개해주어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바스라,알무사이브 직원 3명은 모두 모였지만 이라크 남부인 베이지철도공사,키루크 상수도공사 현장직원 8명은 일부가 도착했다.
김 이사는 베이지,키루크 직원들을 돌려보내 『19일 떠날테니 전 직원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으나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날 하오 바쿠바로 옮긴 인원은 현대 14명,현지인 3∼4명,방글라데시 태국 등 제3국 근로자 30여 명 등 50명에 가까웠다. 그 곳은 수도 전기가 계속 나와 큰 불편이 없었다.
▲18일=단파라디오 3대를 갖고 있었던 직원들은 24시간 교대로 영 BBC,미만의 소리방송을 청취하고 하오 8시부터는 한국의 해외방송도 틀었으나 음질이 나빠 갑갑하기만 했다.
식량·부식은 전쟁 전에 미리 냉동해놓은 것을 그대로 옮겼고 기름도 10톤 가량을 준비해 현지인의 약탈이 걱정스러울 정도였으나 불안하기만 했다.
▲19일=카나킨지역의 이민국에 김씨가 찾아가 출국을 타진,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김 이사는 바그다드의 한국대사관에 찾아갔으나 텅비어 있었고 요르단대사관에서도 『노력해보겠다』는 말국해 BBC사와 소련대사관 등 연락방법을 찾아 헤맸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바그다드시내는 17·18일의 공습으로 포연이 자욱하고 인적이 끊겨 페허를 방불케 했으며 통신소 방송국 등도 건물은 깨끗했지만 안테나가 부서지고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공격,시설만 파괴하는 정교한 공격을 당한 상태였다.
▲20일=전원이 버스 2대,승용차 2대로 카나킨으로 이동했다. 김 이사와 박씨의 부인 모나씨는 이민국 사무실에 월경 허가를 요청했으나 『이 비자는 요르단 국경쪽으로 가게 돼 있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21일=전원이 바그다드의 이라크 외무부로 찾아가 통과지점을 이란 쪽으로 고쳤으나 다시 찾아 갔을 때는 국경이 잠정봉쇄된 상태였다. 이날도 김 이사는 한국과 연락하기 위해 수십 장의 메모를 작성,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든 한국인을 보거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탈출의 희망은 보이지 않은 채 불안과 공포는 점점 커져갔다.<하종오·원일희 기자>하종오·원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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