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며칠 전에 천형으로부터 간단한 편지를 받았었다. 모 병원에서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이 편지에는 보내준 책을 잘 받았다는 말과 함께 건강제일주의로 살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입원한 줄은 알았으나 아마 지금쯤은 퇴원을 했으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꼭 무슨 탈이 있은 때문이기보다도 그저 허약해져서 입원하는 것이라는 말을 전해들은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형이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새삼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된다.유난히도 이 몇 년 사이에 은사와 동학을 많이 잃었다. 그런데 이제 또 천형을 잃고나니,더욱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천형은 6,7년 전에 폐암으로 큰 수술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자체는 후유증이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 하나님이 이 야박한 세상으로부터 천형을 구원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천형은 분명히 우리 시대의 큰 별의 하나였다. 질투심이 날 정도로 천형은 출중한 존재였다. 그러기에 은사이신 이병도 선생께서는 군계일학이란 말로 천형을 칭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천형은 시원스럽고 명쾌하게 일을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나같이 식견이 좁고 판단력이 무디고 망설임이 많은 사람에게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나이는 한 살 아래이지만 오히려 형님과 같이 존경해온 터였다. 천형이 언론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데에는 이러한 박력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천형은 학문적인 활동에서도 이러한 장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흐트러진 실꾸러미의 실마리를 풀 듯이 착잡한 주제를 잘 풀어나가곤 하였다. 그 바쁜 언론계의 생활 속에서도 연구실에서 공부에 전념하는 우리들 이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그러한 명쾌한 판단력에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해방 후에 봄을 이룬 실학연구의 선구자가 된 것이며,우리나라 근대사나 조선시대의 제도사 및 고대사 연구에 뛰어난 성과를 올린 것이며,또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하여 노력한 것이며 이 모두가 길이 기억되어야 할 천형의 학문적 공헌인 것이다. 근자에 천형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기를 원하였고 또 모두가 그 성과를 기다리는 것이었는데 이제 다시는 천형의 글을 대할 길이 없게 되었다.
천형을 생각할 때에 또 느끼는 것은 천형이 심히 결벽성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제가끔 스스로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지만,실제로는 누구나 꺼림칙한 구석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천형에게는 그러한 구석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 결벽성이 천형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술을 즐기게 하고,그것이 우리가 예기했던 것보다도 일찍 세상을 뜨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게 하는 것이다.
천형이 「이번 연말연시를 입원중에 보내니 여러 감회가 있습니다」고 한 그 감회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렇게 감회가 많다는 천형을 한 번 찾아뵈었어야 했을텐데,이렇게 유명을 달리할 줄 알았으면 만사를 제치고라도 꼭 가서 만나뵈었어야 했던 것인데,그저 무심하게만 지낸 것이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회한으로 남는다.
이 세상의 일,이 민족의 일을 누구보다도 많이 걱정하던 천형이었는데,이제 그 걱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니,부디 영혼의 평안을 누리기를 두 손 모아 빌 뿐이다.<한림대 교수>한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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