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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걸고… /유영종(아침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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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걸고… /유영종(아침조망)

입력
1991.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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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케네디 대통령은 확신에 넘치는 어조로 미국 국민에게 호소했다. 『여러분,이것이 곤란과 위험에 찬 노력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지,어떤 희생과 재난을 수반하게 될 지,아무도 정확하게 예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결국 미국은 위기를 승리로 이끌어갔다. 강력한 지도력이 있으면 국민도 안심하고 강하게 대응한다. 위기 극복은 정부의 관리능력에 달렸다. 우유부단하면 불안감이 가중되고 무기력과 자포자기 현상이 늘어날 뿐이다. 무책이 상책일 수가 없다. 케네디의 주장대로 그것이 가장 위험하다. 위기는 강하게 맞서야 극복된다.

엊그제 일요일 아침,청와대에서 물가관련 긴급회의가 열려 경제장관들이 갑자기 불려갔다. 총리서리만이 미리 알았을 뿐 다른 장관들은 새벽에 연락을 받아 사전준비 없이 참석했다는 보도이다.

이 자리에서 강력한 물가진화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관련부처 장관들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긴급회의가 일요일 밤 텔레비전 뉴스시간의 화면에 비쳤다. 대통령의 지시를 관례(?)대로 열심히 메모하는 장관들의 모습이 나왔다. 색안경을 끼고 보아서가 아니라 웬일인지 그들의 표정이 둔감하게만 보였다. 뒤늦게 저 야단을 쳐야하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물가위기의 파고와 인플레 심리가 거셀 것임은 일찍 예상된 바였다. 걱정이 태산같으면서 그래도 쳐다볼만 한데는 정부 쪽 밖에 없다. 상책이 없으면 차선의 억제책이라도 마련하지 않을까 애가 달아 올랐다. 기대는 차츰 허망으로 가라앉는다. 물가당국은 굼뜨기만 하다. 일요일의 긴급회의는 나름대로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부의 휴일 회의 자체가 「비상」이라 할 수 있다. 움직일 때 움직이지 않으면 상황은 악화되게 마련이다. 경제장관들에 대한 질책은 무책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요긴급회의는 우유부단한 행정부내의 충격요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고위층의 지시나 방향제시가 없는 한,재빨리 움직이려 들지 않는 타성에 대한 경고같기도 하다.

정부의 정책수립과 시행,그리고 대응방안은 하방경직성이 짙다. 장관은 지시에 매달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시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임무로 삼는 경향이다. 그 뒤치다꺼리마저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기가 바쁘다.

범죄와의 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 보아도 이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뒤에서 챙겨주고 다그쳐야 긴장감이 살아나고 다른 방안을 모색하려 든다. 공직의 사정 역시 청와대가 맡고 나서야 강도가 높아진다. 입시개혁의 뼈대도 그러하다. 주무부인 교육부가 잔손질을 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가는 형편이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나 통상마찰문제도 관계부처의 대처가 사실상 백지상태나 다름없는데서 혼란과 불안을 야기시켰을 뿐 뚜렷하게 얻는 것 없이 타협의 입지만 허약하게 만들었다.

내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인 결과일 뿐이다. 나서서 뛰면 실점하고 가만히 있으면 기본점수는 지킨다는 안일이 정부 불신을 초래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난제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과감하게 국정을 추진한다면,그러한 과정에서의 과오는 관용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장관 자리는 입각할 즈음보다 떠나면서 화려한 것이 바람직하다. 할 일을 하고 물러나거나,실정의 책임을 당당히 짊어지고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게 진짜 「퇴장의 미」라고 할 것이다. 발탁은 반기고 재임중엔 임명권자의 의중 읽기에만 바쁘고 나가면서 시무룩해 한다면 장관자격은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일요긴급회의에서 장관자리를 걸고 물가를 잡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준엄한 지시가 있기 전에 임무와 책임 수행에 자리를 거는 결의가 마땅히 있어야 한다. 좌고우면하면서 장수한 경우는 아직 본 기억이 없다. 오래만 한다고 장땅이 아니다. 할 일을 하고 차라리 단명으로 끝나는 게 훌륭하다.

자리를 걸고 일하라는 것은 임명권자로선 뼈아픈 권고일 것이다. 이만한 당부를 받은 장관들은 가일층 책임의식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새 내각은 출범과 더불어 내치의 난관을 뚫고 나갈 사명이 부여되었다. 범죄와 물가가 가장 시급히 풀어야할 과제이다. 빠른 시일 안에 해결이 가능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하다가 쓰러져도 좋으니 하겠다는 의지와 행동을 구체적으로 보여달라는 것이다.

내치의 중요함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쉽게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면 족하다. 그것마저 어렵다면 앞으로 편안하리라는 확신을 주는 것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호소와 주장을 정부를 향해 반복해 들려주고 싶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결한 표현을 통해 위기의 실상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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