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관해서라면 일본의 형식적인 사죄는 이미 끝났다. 그간 전·노 두 대통령의 방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일본 국왕과 정부대표의 사과가 있었다. 특히 작년 5월에 노 대통령은 일본 국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한일 두 나라는 지난날의 악감정을 청산하고 앞으로의 새 국제질서 속에서 함께 협력해나갈 것을 다짐하였다.가이후 일본 총리의 이번 방한은 노 대통령의 방일에 대한 답례 형식이며,우리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36년간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아픔은 어떤 물질적인 보상으로도 완전히 치유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날의 쓰라림과,그것이 원인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고통은 생각할수록 깊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 형식적인 청산이 끝난 이상 계속 지난일만 내세워 되풀이 호소하는 것은 민족적인 자존심만 상하게 할 뿐이다.
그보다는 이성적인 눈으로 앞으로의 일본의 행동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입으로는 사죄를 한다해도 실제행동이 여전히 한국을 얕보고 불이익을 끼친다면 불가불 우리는 그간의 사죄는 단순한 형식이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간 일본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독일과 같은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본국민들 사이에는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지난 과오를 합리화하는 경향마저있다. 무엇보다도 일본 교과서의 내용이,또한 재일교포들에 대한 처우 등이 그것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거듭되는 일본 수뇌부의 사죄에도 불구하고 정부내의 일부 고관들마저도 공공연히 한국 통치를 미화하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
이웃하는 두 나라이기에 물질적인 이유만으로 나름대로의 관계가 형성될 수는 있다. 때문에 그동안의 한일 관계에도 감정을 외면한 채 경제적인 협조와 거래가 있었다. 하지만 국민감정을 억누르고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상대를 대할 수밖에 없기에 한국민은 더욱 착잡한 심정을 가져온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은 한일 관계에서는 매우 실감이 가는 말이다. 최근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다케모토·겐이치(죽본건일)는 한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통일은 일본의 이익에 역기능을 한다. 일본은 김일성을 도와 남북한간의 대립이 오래 지속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민은 일본에 대한 원한이 있기에 만일 통일이 되면 그들의 민족적 에너지는 반일의 방향으로 분출되어 일본에 큰 위협을 줄 것이다』고 말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단견이기는 하지만 매우 솔직한 발언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 명과 왜 사이에 거론된 바 있었고,일본이 명치유신으로 근대화에 나서자 맨처음 러시아와 함께 한반도를 40도선 또는 38도선으로 분단할 것을 교섭했었다. 식민지시대 일본 육군인 관동군과 조선군의 관할지역도 38도선이었다.
제2차 대전 후 미소는 자연스럽게 일본군이 설정한 관할경계선을 그대로 인수했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가 있음에도 일본의 식자 사이에는 아직도 한반도의 분단을 바라는 자들이 있다니!
저마다 민족에는 변함이 없는 성격,즉 원형이 있다. 때문에 민족적인 자각이 없는 한,그 역사는 결정적인 시점에서 상황의 노예가 된다. 일본은 국력이 팽창하여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어김없이 한국을 침략했으며 그 첫 단계가 한반도 분단의 시도였다. 풍신수길의 천하통일,명치유신의 국민국가 형성이 그러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경제대국으로서의 성장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말로만 반일을 내세웠을 뿐 실질적인 방위가 없었던 것이 일관적인 패턴이었다. 변함이 없는 민족 원형과 자각없는 태도는 어김없이 범역사적인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
일본의 한국 침략은 그들 자신에게도 매우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풍신수길의 멸망,군국일본이 받았던 핵폭탄 세례가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
「슬기로운 자는 남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데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역사에서도 반성의 계기를 찾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날 일본은 군사대국이 됨으로써 곧바로 몰락의 길을 택했다. 오늘날 일본은 경제대국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그에 어울리는 보편적인 사상과 윤리성이 없다. 힘에 이성과 윤리성,특히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을 때 폭력이 된다. 한국 분단의 지속을 바라는 일부 언론이 있는 채 일본이 경제대국의 절정에 이른 이 시점에서,가이후 총리의 방한을 마음열어 환영할 수 만은 없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해방 이후 우리의 교육목표의 하나가 「반일」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감정적이었을 뿐 이성적인 반성의 계기는 없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지혜롭게 일본에 접근하고,지난 좌절의 원인을 바르게 인식하여 민족적 자각의 계기를 삼아야 한다.
가이후 일본 총리는 이번 방한 때 독립운동과 유서가 깊은 파고다공원을 찾는다. 일본 지도자로서는 전에 없던 일로 우리는 그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상징적 행위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웃을 미워하는 대신에 호의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을 열고 협력을 하는 것이 상대를 미워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서로에게 준다. 새로운 국제질서와 역사적 현실 또한 서로의 협력을 요청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김용운 한양대 교수>김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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