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아침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된 노태우 대통령의 새해 기자회견은 임기 4년을 맞는 대통령답게 여유가 있었다. 한 시간반 동안 국정전반에 걸쳐 소신과 계획을 피력하는 모습은 확실히 여유를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질문하는 기자들의 기사 송고 마감시간까지 걱정해주는 배려도 세심했고 어느 신문의 연두사설 구절까지 인용하는 것도 새로운 스타일의 시도였다.스타일에서 무난했던 것처럼 내용 면에서도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합당으로 정치안정을 이룩했다」는 스스로의 평가가 다소 귀에 거슬리기는 했으나 「내치에 약하다」는 지적에 대해 「겸허하게 반성한다」는 말로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한꺼번에 분출되는 욕구불만에 힘과 권력으로 대처했더라면 또 한 번 혼란과 좌절이 왔을 것」이라는 분석에도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앞으로 마무리 결산단계에서는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에 더 비중을 주어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관용과 인내가 자신의 정치철학임을 스스로 공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사실 민주화시대의 대통령은 권위주의시대의 대통령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을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정치는 정치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명언인 것 같다. 오늘날의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더욱 절실하게 들린다.
내각제개헌 문제에 대해 「국민이 원치 않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답변으로 명쾌하게 잘라 여운을 남기지 않았고 페르시아만의 의료진 파견에 대해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었다. 전투병력 파견문제에 대해서도 「요청받은 적도 검토한 바도 없다」는 한마디로 시원한 답변을 대신했다.
「북한이 끝내 동시가입을 반대하면 우리라도 먼저 가입할 수밖에 없다」는 유엔정책설명이나 「북방외교와 전통우방외교는 서로 대립되는 게 아니다」는 설명은 간단명료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었다. 남북관계를 얘기하면서 「김일성 주석」이라고 두 번씩이나 호칭한 것도 그간의 세상의 변화를 새삼 일깨워주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사회간접투자기획단」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이나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하겠다는 다짐도 전체 국민이 앓고 있는 경제·사회문제의 핵심을 건드린 것 같다.
그러나 회견이 모두 끝난 후 갖는 느낌은 한마디로 그렇게 흡족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회견을 들을 당시에는 스타일도 내용도 모두 무난하다고 느꼈는데 끝난 뒤가 흡족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현실인식에서 노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국민들은 심각한 난국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그렇게까지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한두 대목에서라도 난국을 걱정하는 지도자의 고민이 비쳐지고 난관을 돌파하겠다는 지도자의 결의가 번득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여유와 스타일이 지나치게 강조된 탓일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