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공군에 의한 KAL기 격추는 반문명적 만행임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다. 당시 소련측은 간첩행위로 날조하여 책임회피에 발버둥쳤으나 단순히 항로를 이탈한 민간기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었음도 그 이후 계속 밝혀지고 있다. 7년 전의 악몽과 전율은 지금까지 지울 수가 없다.소련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가 소련군이 KAL기 잔해를 사할린 부근 해저에서 발견했음을 밝혀 내고 「무서운 실수」에 대한 비난을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는 보도가 뒤늦게 알려졌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은 울분이 불에 기름을 끼얹듯 다시 끓어 오른다. 아무리 국교 정상화 이전의 참극이라 하여도 비인간적 만행이 이토록 철저하게 은폐되고 조작될 수 있을까 하는 분노의 불길을 걷잡기 어렵다.
우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일본의 북단 와카나이에서 북녘의 차디찬 바다를 향해 뿌린 유족들의 피를 쏟는 통곡이 얼마나 허망했던 것인가.
한층 충격적인 것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의 보도 내용이다. 소련 신문을 인용한 이 보도는 사고 해역에서 인양한 탑승객 2백69명의 유해를 한 구덩이에서 소각해 버렸다고 폭로했다. 새삼 심장에 비수를 찔린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진실은 언제이고 날조와 허위와 은폐를 무너뜨리고 만다. 철저하게 통제된 소련의 언론이 개방의 물결을 타고 KAL기 사건의 진상을 공개한 것은 놀라우면서도 주목할 만한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제 KAL기 격추의 진실은 한 점의 의혹도 남지 않게 솔직히 밝혀져야 한다. 스파이다,자위권 발동이다 하는 냉전시대의 논리는 통할 수가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진실이 드러나면 그에 응당한 사과가 따라야 함도 너무나 당연한 국제관계의 상식이라 할 것이다.
한소 국교정상화 이후 외무장관회담에서 셰바르드나제 외상의 유감표명이 간접적으로 우리측에 전달되기는 하였다. 이 정도로 「역사의 만행」이 쉽게 아물고 마무리될 수는 없다. 주권국가와 국민의 자존도 그러하지만 두 나라의 대등한 협력관계를 위해선 공식적인 해명과 사과가 반드시 선행 되어야 한다.
상호 협력관계만 강조하고 과거의 상처를 유감으로 유야무야 시킨다면 진정한 선린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잘못된 과거는 야무지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6·25에 대한 인식과 책임도 예외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국제관계에서도 인간성과 도덕성은 지켜져야 할 무거운 원칙이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애매한 자세는 통해서 안 된다.
개방과 개혁을 지향하는 소련은 겸허하게 사건 자체를 재점검하고 당시의 상황규명과 뒷처리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정부의 북방외교도 아울러 떳떳하게 추진되어야 함을 강조해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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