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29년 전인 1962년 1월6일 경기도 파주에서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갔던 농민들이 미군의 총격으로 때아닌 죽음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운천2리 주민들이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약 3㎞ 북쪽의 임진강을 건너 미군 제1기갑사단 8연대 D중대가 있는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 뒷산으로 올라간 데서 비롯되었다.이들이 나무를 해가지고 산에서 내려올 무렵 많은 미군 병사들이 느닷없이 이들을 포위하면서 총을 쏘아댄 것이다.
이 총격으로 황광길이라는 25세의 청년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유기용이라는 38세의 농민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치료중 사망했다. 미군당국은 당시 신문보도가 아니었더라면 묻히고 말았을 이 사건에 대해 「비무장지대에 들어온 나무꾼 2명이 순찰병의 정지명령을 어기고 도망갔기 때문에 사살되었다」고 간단히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인권옹호협회의 진상조사 결과는 그같은 미군의 발표가 거짓이라는 것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사건 한 달 뒤인 그해 2월9일 한국인권옹호협회는 ▲사건현장은 단순히 출입금지구역일 뿐 비무장지대가 아니며 ▲M1소총이나 기관단총이 아닌 엽총으로 피살되었고 ▲옷에 핏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벌거벗긴 채 쏘았다는 사실 등을 발표했다.
이 조사결과에 따라 한국인권옹호협회는 「명백한 살인행위」라는 항의문을 미국 대사와 유엔군 사령관에게 보내고 위자료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군당국은 「배상금 지불을 고려해보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으나 나중에는 「배상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통고해왔다. 그 대신 유족에게 백만환의 위로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했다. 미국측의 이러한 무성의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억울한 사건은 그것으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이쯤 해서 넘어가자는 미국측의 압력에 한국정부도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주한미군에 의한 총격·린치·삭발 등 각종 사건이 파주 양주 등지에서 잇달아 일어났고 대학생들이 미군의 폭행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한미행정협정의 체결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초 한미 양국은 미군이 한국에 상주함에 따라 행정협정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공동성명을 53년 발표했으나 미국측의 외면으로 체결이 지연되어왔었다.
그러다가 파주나무꾼 피살사건 등으로 데모가 계속되자 여론에 못 이겨 81차의 끈질긴 교섭 끝에 1966년 7월9일 서울에서 이동원 외무장관과 딘·러스크 미 국무장관 사이에 서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협정은 한국측에 굴욕적이라고 할 만큼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라는 비난을 받아왔었다. 그래도 한국정부당국은 한미 관계를 대등한 동반자관계자라고 설명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
주한미군의 철수가 기정사실로 논의되는 시점에서야 겨우 불평등조항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파주에서 한국 양민이 미군의 총에 맞아 죽은 지 꼭 29년 만에 이상옥 외무장관과 그레그 주한 미 대사간에 문제의 불평등조항을 개선하는 협정이 지난 4일 서명되었다는 것도 기억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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