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솟는 해지는 별”/철의 여인 대처·31년 집권 이광요등 퇴진/알사바 국왕·도 대통령 비참하게 쫓겨나/메이저·오작동·바웬사 새 조타수로 등장냉전이라는 구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질서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과도기적 상황이 계속된 90년도는 다른 어느 해보다도 「대권교체」가 활발했던 한 해였다.
대권의 교체과정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외세의 간섭에 의한 타율적 방식,양위를 연상시키는 권위주의적 방식,또 지도자의 결단에 의한 자발적 방식 등도 적지 않아 다양한 승계과정을 엿볼 수 있는 한 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꽃다발 속에 「영광스럽게」 퇴진한 영국의 대처 총리 같은 지도자가 있었는가 하면 반대파에게 살해돼 그 시체가 전시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은 라이베리아의 도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도 있었다. 권력의 교체과정이 각국이 처한 정치발전상황에 지배될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집권자 자신의 판단력과 안목이 정권교체가 무리없이 이루어지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년 벽두인 1월3일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안토니오·노리에가 장군은 미군의 파나마 침공 이후 14일간의 도피생활을 끝내고 미군에 투항,그의 「요란스러운」 통치를 극적으로 마감했다. 미국의 「내통자」에서 출발,결국은 마약밀매혐의라는 「엉뚱한」 죄목으로 미국의 수인으로 전략한 그는 필리핀의 마르코스,이란의 샤·팔레비 등과 함께 미국이 국가이익을 위해 매정하게 희생시킨 3대 인물 중의 하나였다. 68년 이래 미국의 정책에 충실한 협력자였던 그를 미국 정보당국은 「잔인하고 충성심 없으며 단기적 효용가치를 지닌 인물」로 평가했으며 파나마운하 귀속문제를 둘러싼 갈등 이후에는 집요한 실각공작을 전개했다.
노리에가를 실각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한 사실은 탈냉전 이후 미국의 중남미 외교가 『독립국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미국은 언제라도 개입할 권리가 있다』라는 27년의 헨리·스팀슨원칙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노리에가에 이은 파나마의 새 지도자는 변호사 출신의 친미주의자 기예르모·엔다라. 엔다라는 89년 선거에서 「실질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긴 하지만 집권 이후 파나마운하의 귀속을 성취해낸 토리호스 장군의 격하작업을 통해 「미국의 은혜」에 「보답」하고 있다.
역시 중남미국가인 니카라과에서 반미적인 다니엘·오르테가 대통령이 2월 총선에서 패배,친미적인 비올레타·차모로 여사에게 대권을 넘겨줬다. 차모로의 집권은 ▲산디니스타혁명을 촉발시킨 남편의 후광 ▲동구공산정권의 잇단 붕괴 ▲10년 내전으로 피폐된 경제 ▲염전 분위기 등이 중요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79년 이후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해 경제·군사·외교적 압력을 늦추지 않았던 미국의 이른바 「저강도정책」이 정권교체의 보다 큰 배경으로 작용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오르테가는 선거결과에 깨끗이 승복,훗날을 기약했다. 오르테가의 이러한 결단은 정권교체 과정에서 항상 피를 흘려야 했던 니카라과의 정치역사에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다.
7월에는 토도르·지브코프의 27년의 공산독재를 끝장낸 89년 11월 불가리아 궁정혁명의 주역 페타르·믈라데노프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민주화 시위를 탱크를 동원,진압해야 한다고 한 과거의 강경발언이 표면적인 사임배경이었지만 총선을 통해 재집권한 공산당이 여론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실상 불가리아의 실권자인 안드레이·루카노프 총리는 믈라데노프 사임카드를 통해서도 국민의 불만이 진정되지 않자 급기야 야당과의 연정을 시도했으나 실패,결국 11월말에 사임하고 말았다. 불완전한 변혁에 머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이라크의 침공으로 인한 알사바 쿠웨이트 국왕의 망명과 파키스탄 부토 총리의 실각이 8월 초순 잇달아 벌어졌다.
알사바 국왕은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야심의 희생자이지만 국내적으로 의회정치를 말살하는 등 정정불안을 초래,외침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자업자득이라는 비난도 면키 어렵다.
부토 여사의 실각은 지아·울·하크 전 대통령 추종자들의 집요한 음해공작과 그녀에 대한 군의 「불신」이 맞아 떨어진 가운데 굴람·이샤크·칸 대통령의 해임이라는 「기묘한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녀는 총선을 통해 「영광의 복귀」를 기도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후임 총리로 친군부 인사인 나와즈·샤리프가 선출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라이베리아의 사무엘·도 대통령의 최후는 올해의 가장 비극적인 지도자의 최후였다.
반란세력에 전 국토를 다 내준 상태에서도 「패배」를 거부한 도 대통령은 9월9일 프린스·존스파 반군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뒤 시체가 전시되는 사체모욕까지 겪는 「이중의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80년 쿠데타 당시 톨버트 대통령 일가의 시체를 블도저로 묻어버리고 전 각료를 해변에서 공개 총살한 도 「상사」이고 보면 그의 최후는 악업에 걸맞는 것이었다. 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베리아의 권력공백상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0월3일 독일 통일의 성취로 동독의 마지막 총리로 3월에 집권했던 드 메지에르 총리가 「행복하게」 권좌에서 물러났다. 동독 소멸의 의미를 「환상의 종말이자 눈물없는 작별」이라는 절구로 요약했던 그는 통일독일정부내에서 국회의장이란 중책을 맡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슈타시 망령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권력의 중심부에서 물러나와야 했다.
11월에는 철의 여인 대처 영국 총리가 사임하고 곡예사 아들이며 고교중퇴 학력의 존·메이저가 「대영제국」호의 새로운 「조타수」로 등장했다. 시대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굽힐 수 없었던 대처는 여론과 국제적 환경이 그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자 미련없이 대권을 포기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임으로써 분열위기의 보수당을 구하고 영국이 새로운 국제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쉽지 않은 용단에 국민들은 꽃다발로 답례했고 영국병을 퇴치하고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인 그녀의 치적은 멋진 끝마무리로 더욱 빛났다.
같은달 31년 집권의 싱가포르의 이광요 총리가 오작동에게 총리직을 물려줬다.
싱가포르의 권력승계는 이광요가 내각에 계속 머무르면서 「섭정」할 의사임을 밝히고 있어 현대판 양위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중국의 등소평이 모든 공직에서 떠났음에도 최고실권자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체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와 중국은 권위주의적 정권이라는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빠뜨릴 수 없는 인물 중의 하나는 폴란드의 보이체흐·야루젤스키 전 대통령. 바웬사와 마조비에츠키간의 이전투구식의 대권다툼 과정에서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동구권의 공산지도자 중에 가장 행복하게 권력을 물려준 인물이다.
역사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적절한 대응을 통해 폴란드의 탈공산과정을 폭력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유동희 기자>유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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