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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파행 점철… 얻은건 “정치불신”/90년 정치권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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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파행 점철… 얻은건 “정치불신”/90년 정치권 결산

입력
1990.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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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고 “3당합당” 내분추태만/야는 당리집착 통합기대 외면/날치기·각서파동서 절정… 지자제 부활에 겨우 자족90년의 정치는 일말의 기대 속에 시작되었다. 89년 한 해를 한치의 여유없이 옥죄었던 5공청산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세밑 국회증언으로 형식 차원에서 매듭지어지자 정치권은 90년의 정치에 전향적 자세를 보였고 국민들도 정치에 대한 희망감을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90년의 정치는 자체 문제의 해결에도 실패하는 구조적 무력증을 보이면서 국민의 정치불신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사회 각 분야의 상위개념으로서 각 분야를 이끌어야 할 정치는 선도에 나서기는커녕 후미에서 쫓아가지도 못했으며 이 와중에서 정치불신은 치유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게 1년간의 평가이다. 우리 정치가 30여 년에 걸쳐 점철된 파행으로 평가절하가 계속되어온 것만은 분명하나 90년은 여기에 또 하나의 커다란 감점요인을 던져주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90년 정초 정치권은 과거의 유산을 털어버린 바탕 위에서 새 정치질서를 모색하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바빴다. 4당체제 아래서의 4당 대표들은 90년 신년사에서 한결같이 새 시대의 새 정치가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민정당의 남재희 대표권한대행(박준규 대표는 89년말에 정계개편발언파문으로 사임)은 『5공 청산을 이룩한 대타협의 정신으로 묵은 숙제를 풀어나가겠다』고 말했고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피땀흘려 싸워 쟁취한 국민정치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국민정치시대의 개막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을 이뤄나가자』고 강조했고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는 『역사 역행을 푸느라 미처 하지 못한 민주화 과업을 본궤도에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이러한 정치지도자들의 새해 다짐은 불과 한 달이 못 돼 기습적으로 이뤄진 「1·22 3당합당선언」에 의해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된다.

여야가 한 데 모여 새 당을 출범시킨 3당합당은 세계 정치사상 유례없는 대시험으로 90년 정치를 하루도 바람잘 날 없게 만들기만 했다.

3당합당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총재와 김종필 공화총재는 3당합당이 대립과 반목의 정치불안을 해소하고 국가발전에 절대 긴요한 정치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김대중 평민총재는 국민의 뜻을 배신한 밀실야합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3당합당이라는 대변혁이 새 정치판도 구축을 암중모색했던 봄정국은 혼란의 연속으로 표류를 감내해야만 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된 민자당이 출범준비 과정에서 3계파의 대립으로 쉴 새 없는 내분을 겪는 동안 물가와 치안 등 민생문제는 뒷전으로 밀렸고 총체적 난국이 조성돼 국가차원의 위기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창당과정의 민자당 내분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김영삼 대표와 박철언 전 정무장관 사이의 정면대립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정면대립은 민자당을 침몰 직전 상태로까지 몰아넣었던 10월 내각제 각서파동의 전초전이었다.

여권이 자체하중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국주도 역할을 포기하고 있는 동안 야권은 반민자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야권통합을 추진했으나 이 역시 국민들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여야의 정면대치는 7월 임시국회를 결국 날치기로 막을 내리게 했고 정치권의 무기력증은 극에 달했다. 7월14일 26개 의안이 33초 만에 날치기 처리되자 야당 의원 전원은 의원직을 총사퇴했고 정치는 완전 실종되었다.

여권이 사퇴정국의 돌파구 마련을 위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평민·민주 등 야권은 장외투쟁을 배수진으로 치는 강경투쟁에 나섰다.

야권은 사퇴정국의 여세를 몰아 또다시 야권통합에 전력투구했지만 뜨거운 여름을 보냈을 뿐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을 들어 대홍수가 나고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총리가 고위급회담을 갖는 등 국가적 관심사가 속출해도 정치권은 잠을 자고 있었고 이러한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정치권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10월8일 단식투쟁 돌입이라는 극약처방을 불사했고 민자당은 10월24일 내각제 합의각서가 공개돼 와해 직전까지 가는 극심한 내분을 겪었다.

내각제 각서파동은 국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을 재확인시켜주었고 공개적 추진단계에까지 갔던 내각제개헌을 사실상 백지화시켰다. 각서 파동은그 전모는 차치하고라도 파동의 전개과정에서 정치이면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정치에 대한 불신을 계속 높였다.

여야는 11월에 들어서야 더 이상 정치의 표류를 방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국면이 초래될 것이라는 공동인식 아래 지자제 실시를 담보삼아 4개월여만에 겨우 국회를 정상화시켰다. 그러나 이 국회 역시 지자제선거법만을 여야합의로 통과시켜 30년 만의 지자제 부활을 확인했을 뿐 끝내 날치기로 종지부를 찍었다.

지자제 실시는 자랑할 것 없는 90년 정치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성과이다.

여야가 91년 3월 실시가 유력시되는 지자제선거에서 「민의의 세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경우 정치권의 중병은 치유될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

90년 정치가 남긴 부의 유산인 정치불신을 청산하는 길은 지자제 실시를 통해 정치가 자생력을 기르고 자정력을 회복해 가는 방법이 첩경일 것이다. 90년 새해에 가졌던 우리 정치에 대한 전향적 기대를 지자제선거를 통해 다시 한 번 기대해볼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이병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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