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통을 똑바로 지켜야 정치도 정부도 권위가 살아 난다. 권위는 신뢰와 정직이 우선해야 한다. 단순한 힘과 제도의 위엄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잘못이 거듭되면 체통은 날아가 버린다.지난 한햇동안 행정·입법부는 말할것 없이 사법부까지 크게 체통을 잃고 상처를 입었다. 지나간 아픔을 꼬치꼬치 들춰낼 필요는 없지만,그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럽게 한해를 보낸 것은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사면초가의 신세였다. 하는 일마다 욕바가지이고 혼란과 불안의 책임을 몽땅 뒤집어 썼다. 뒤집어 썼다기 보다는 자초했다고 봄이 옳음직 하다.
얼마전 꼴뚜기가 어물전 망신을 시켰다. 정부 산하기관 감사들의 외유병 때문이다. 호기를 부린 해외출장끝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감사협의회라는 친목단체를 만든 것이 먼저 수상하고 마땅찮다.
이 단체의 알선으로 감사들이 무리를 지어 장기 해외여행을 즐겼다. 과다비용은 물론 공금으로 틀어막았다. 「동구감사세미나」 참석이라는 명목이 우리를 실소케 한다.
못난 행태가 공직의 체통을 상하게 했을 뿐 아니라,정부의 권위를 깔보았다는 점에서 쉽게 넘길 일이 못된다. 직위의 이용과 공금의 남용만 탓할 수 없다. 정부와 공직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가 한층 큰 일이다.
경우가 다르겠으나 연말연시를 맞아 봇물처럼 터지는 국회의원들의 외유병도 호된 여론의 비난을 한창 받고 있다. 감사들의 무분별·경솔과 피장파장이다. 그러나 의원들의 외유병은 체통만 따질 일이 안된다.
우리 사회엔 부정의 심리가 상당히 넓게 자리잡았다. 나만 잘해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체념도 강하다. 거부와 반발은 부조리와 갈등관계가 심할수록 더 예민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부정 심리의 배경을 깔고 볼 때,의원들의 외유는 여러가지로 우려를 불러 일으킨다.
먼저 분명한 공무가 없는 공무여행은 낭비만이 아니라 도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비록 사인이라도 사치한 해외여행이 엄하게 규탄받는 마당에 의원들의 「고급출장」이 국민의 눈에 곱게 비쳐질 까닭이 없다. 한가한 나들이를 보면서 정치사정이 어둡게만 느껴진다. 지금 그럴 형편이 아님을 의원 자신이 더 잘 알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여행 경비로 행정부처의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도 들린다. 사실이라면 행정부에 대한 견제는 커녕 시녀로 백안시 당한들 아무 할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국회,그런 의원은 있으나 마나라는 생각을 과격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을 줄 안다.
국회 위상의 격하는 더 큰 염려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고 그 우위성을 자랑으로 삼는다. 이 체제의 기반과 강점이 바로 의회주의이다. 국정의 중심이 의회이며 국민의 의사가 여기를 통해 반영된다. 국회가 제대로 굴러 가면 국민은 안심하고 정치에 무관심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의회주의가 약화되고 흔들리면 자유민주의 체제가 불안해 진다. 위협은 밖에서 가해질 수도 있고 안에서 자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신과 5공시대엔 통치자의 자의로 의회주의가 크게 위축 당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그런데 현실은 기대 밖으로 전개되어 간다.
의회정치가 권력과 당리 싸움에 몰두하고 집단이기주의를 추구하면 의회주의에 대한 회의가 움튼다. 없는 것만 못한 국회가 있는 한,자유민주주의는 개화하기 점점 어려워 진다. 의정이 국민의 뜻과 역진하는데 어떻게 의회주의를 신봉하겠는가. 의원 스스로가 의회주의를 시들게 만들면 부정의 심리가 더욱 고개를 들 것은 뻔한 이치이다.
의회주의에 대한 불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주의 근간인 선거제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위험이 도사린다. 아무리 귀중한 한표의 권리를 행사해도 표 따로,정치 따로 식으로 분리현상이 확산하면 투표의욕이 식어 버린다.
내년에 실시할 지방의원선거를 앞두고 지금의 국회와 난형난제의 지방의회가 탄생하지 않을 까 하는 냉소적 의견이 떠돌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지방의회가 정치의 난장에 말려 들고 이권과 낭비의 마당이 되어 버리면 선거에 대한 불신과 회의는 깊어만 갈 것으로 내다 보인다.
의원들의 행태는 파급의 범위가 아주 넓다. 해외여행쯤으로 왜이리 어수선하냐고 고까워 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안일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건전한 의회주의는 국민이 키우고 의원이 지켜야 한다.
의회와 선거에 관한 회의와 불신이 있다면 그것은 독재 못잖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협 요인이라 할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한결 같이 의회주의 신봉자임을 강조하고 나선다. 이 신념이 진정으로 확고하다면 자기중심의 아집과 용기있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국민의사와 따로 노는 정치가 곧 반의회주의이기도 하다. 외유병은 쉽게 보면 안된다. 부정의 심리를 자극하는 행태는 버려야 옳다.<논설위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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