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빴던 발걸음 「교류물꼬」 실감”/올 36차례나 판문점행/“이름 물어오는 북 손님들 낯설지 않아/서로 벽만 확인 접촉공전에 아쉬움도남과 북을 가로막은 민족의 장벽은 여전히 견고한채 분단 45년을 넘기고 있지만 90년은 그 어느때보다 힘찬 교류와 대화의 물결이 이 장벽을 넘나든 한해였다.
남북 고위급회담에 참가한 양측총리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최고 지도자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을 만났고,예술인들의 교환공연이 열렸으며 통일 축구대회가 교환경기로 벌어졌다.
남북대화 사무국 연락부 직원 김민영양(24·서울 서초구 원지동 377의8)은 금년에 36차례나 판문점을 다녀왔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87년 1월부터 해마다 판문점을 오가며 안내업무를 했지만 올해처럼 발걸음이 잦았던 적은 없었다. 지난 1월10일 북경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체육회담을 시작으로 지난 14일 끝난 제3차 고위급회담까지 김양만큼 많은 북한 사람들을 접촉한 사람도 드물다.
사무실의 단조로운 워드프로세싱 작업을 벗어나 처음 북측 손님들을 대할때는 두렵고 낮설게 느껴졌으나 찻잔을 받으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이름을 묻는 북한 인사들이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김양에게는 판문점은 아직도 남북의 접촉이 겉돌기만 하는 곳이다.
한중 무역 대표부가 설치되고 한소정상이 모스크바에서 만났으며,북한과 일본간에 국교정상화가 논의되는 상황이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독일이 하나되듯 쉽게 판문점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사라질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김양은 오히려 『단일팀 구성이 무산됐는데도 북경공인 체육장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때 남북의 응원단이 태극기와 인공기를 함께 흔들며 환호하던 광경이나 통일 전통 송년음악회가 끝난뒤 「우리의 소원」을 합창한 공연단과 관객의 어깨동무에서 통일의 당위성만 재확인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렵게 성사된 고위급회담은 근본적인 견해차만 드러낸채 공통분모를 찾아내지 못하고 성과없이 끝났다.
90년의 남북관계에서는 정부차원의 접촉보다 민간차원의 통일논의가 훨씬 큰 국민의 관심과 열기를 끌어 모았다. 재야·학생운동권은 운동역량 결집의 구심점을 「통일논의에 바탕한 교류추진」에서 찾았다.
전민련이 88년부터 추진해 온 범민족대회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분단이후 최초의 독자적 민간교류 움직임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남북 자유왕래를 허용한 노태우 대통령의 7·20 「민족대교류」 선언이후 봇물터진듯한 교류열기에도 불구하고 8·15 45주년 기념 범민족대회는 참가범위와 대회 성격을 둘러싼 남북당국·전민련의 동상삼몽으로 결국 무산됐다.
오사카 조선학 국제학술대회(8월) 뉴욕 남북영화제(10월) 등은 비정치적 분야의 교류를 넓혀준 계기로 평가되고 있다.
김양에게 가슴저린 기억으로 남는 것은 통일 전통 송년음악회에 참가했던 북측의 인민배우인 서도명창 김진명씨(78)와 남의 동생 학명씨(74)가 상봉하던 모습이다.
『두살 아래인 임수경양이 북한땅을 밟아보고 느꼈을 충격을 얼마나 어떻게 극복했을까 하는 것이 정말 궁금하다』는 김양은 『남북 어느쪽이든 불이 당겨진 교류와 통일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어리석음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하종오기자>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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