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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회 의사당/황소웅 편집부국장(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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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회 의사당/황소웅 편집부국장(메아리)

입력
1990.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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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시의회 의사당 건물로 사용키로 한 태평로의 전 국회의사당 건물은 1935년 일제가 경성부의 부민관으로 세운 것이었다. 연극 영화와 강연 집회 등을 위해 지은 것이어서 많은 공연이 이곳에서 이뤄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춘원 이광수등이 학병으로 가라고 연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더 멀리 조선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 건물의 터가 사형장소였다는 얘기도 있고 죽은 궁녀의 시체를 버리던 곳이라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터가 센곳인 모양이다.굳이 조선시대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여의도로 이사가기 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쓰여졌던 약 20년 동안만 보더라도 이 건물이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 국회가 처음 들어섰던 것은 50년 12월8일이었다. 그러나 6·25가 한창이던 당시엔 임시로 잠깐만 쓰여졌을 뿐이고 태평로 의사당으로 정식 정착한 것은 54년 6월9일이었다.

수난의 태평로시대는 이사해온 해인 54년 11월27일 사사오입 개헌 파동으로 첫 얼룩을 기록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안을 처리하면서 재석 2백3명중 찬성이 1백35표로 3분의 2(1백36표)가 되지못해 부결되었다고 선포한 후 재석의 3분의 2는 135·33…이므로 사사오입하면 1백35명이기 때문에 개헌안이 가결되었다고 번복해서 일어난 소동이다.

58년 12월엔 국가보안법 파동으로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자유당이 제안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의사당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3백여명의 무술경관이 들어와 야당의원들을 모두 끌어낸 뒤 자유당의원만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4·19 당시에는 부상학생들이 본회의장에 나타나 목발을 휘두르는 사태도 있었다. 4·19의 소용돌이를 지나 5·16 군사혁명을 맞았을 때에는 의사당의 문을 닫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간판을 다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뒤에도 한·일 협정비준 파동,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파동,8대 국회의 10·2항명 파동,유신의 전초전이었던 국가보위법 파동 등 정쟁으로 얼룩진 파동의 역사가 계속되었던 곳이 태평로 의사당 이었다.

싸움질만하고 시끄러운 곳이 국회라는 인식이 박대통령에게도 깊이 박혀있었던 탓인지 시끄러운 싸움을 서울 한복판에서 하지 말고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실컷하라는 뜻에서 75년 의사당은 태평로에서 여의도로 옮겨갔다. 약 20년간의 태평로 국회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이후 그 건물은 다시 서울시로 넘어가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서 각종 공연과 집회의 장소로 쓰여지게 되었다. 당초의 부민관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그러나 75년에는 야당인 신민당의 폭력전당대회,반당대회의 장소로서 애꿎은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수난의 태평로 의사당 건물이 내년부터는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서 16년만에 정치무대로 다시 활용된다는 소식이다. 앞으로 거기서 펼쳐질 지방정치시대가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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