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소련이 40여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트기로 합의한 것은 지난 9월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14일 저녁 두 나라 정상이 발표한 「한·소 관계의 일반원칙에 관한 선언」을 접하고 비로소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 속칭 「모스크바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이 합의는 두 적대국이 국제사회의 우호적인 파트너로서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다짐하는 역사적 문헌이다. 6·25전쟁이나 대항항공여객기 격추 같은 「과거의 청산」이 외무장관회담에서 뒤늦게 공식거론돼 아쉬움을 남겼지만 어쨌든 아시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9월말의 국교합의가 의례적인 합의였다면,우리는 모스크바선언에서 구체적으로 두 나라 관계를 규정하는 정치·문화·경제적 원리·원칙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먼저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규범을 존중한다는 큰 원칙을 분명히하고 있다. 무력에 대한 반대,군비경쟁의 완화,호혜적인 협력과 교류 등 구체적인 합의내용들도 이 커다란 원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선언은 또한 동북아를 포함한 아시아지역의 새로운 평화구조를 냉전종식의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반도에 관해 남북한의 대결종식과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되도록 남북대화가 지속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유럽에서 독일통일이 전후 인접국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과 엇비슷한 규정을 두고 있다. 두 나라 관계가 『각자의 제3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대목이다. 적어도 한국의 경우 미국,소련의 경우 북한을 의식하고 밝힌 내용일 것이다.
크게 보자면 이번 한·소 두 나라의 모스크바선언은 지난 7월 콜 서독 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세상의 예상을 앞질러 독일통일에 합의한 것과 비슷한 성격의 「정치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독일의 경우처럼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소련은 85년 만에 서울에 돌아오고,그럼으로써 아시아라는 역동적인 무대에서 한 몫을 담당할 채비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우리로서도 비극적인 남북대결을 청산하는 힘드는 과정에서 확실하게 한걸음 전진하게 된 것을 뜻한다.
이제 동북아는 한국과 소련이 「우호적인 파트너」를 선언함으로써 지금까지 예상했던 것 이상 빠르게 탈냉전시대의 질서를 찾아 움직이게 될 것이다.
「고립」을 고집해 온 북한은 조만간 보다 유화적인 태도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우리는 북한과 함께 「개혁」을 견제하는 입장에 서 있는 중국도 우리측과의 전면적이고 공식적인 국교관계 수립이 동북아의 평화와 분단된 한반도의 재통합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루빨리 갖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와 사실상의 동맹관계에 있는 일본은 거꾸로 평양측과의 협상을 가속화할 것이다. 북경에서 진행돼 온 미국과 북한의 대화도 속도를 빨리 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과 소련의 모스크바선언이 이러한 일련의 질서재편작업의 시발점이 될 것은 거의 확실하다. 또한 궁극적으로 북한이 굳게 걸어 잠근 고립의 문을 열고,평화와 진보를 지향하는 탈냉전시대의 큰 흐름에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동북아의 냉전청산은 이제 겨우 상징적인 한걸음을 내디딘 데 불과하다.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우리의 장래를 내다보는 신중한 외교를 구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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