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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빈민의 시위/이장훈 외신부 기자(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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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빈민의 시위/이장훈 외신부 기자(기자의 눈)

입력
1990.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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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권력의 핵심인 크렘린궁과 무려 3천여 개의 객실이 있는 소련 최대의 호텔 중 하나인 러시아호텔 사이 공터에는 외국인들로서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영하의 날씨 속에 구경거리로 등장하고 있다.지난 수 개월 전부터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한 무주택자들이 정부당국에 대한 항의표시로 붉은 광장과 크렘린궁이 보이는 러시아호텔 뒤편에 간신히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비닐과 나무조각 등을 엮어 집단노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약 1백여 명 남짓한 이들은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까지 딸린 채 정부측에 살 곳을 마련해달라며 플래카드와 각종 문구 등이 쓰여진 종이조각을 내걸고 투쟁하고 있다.

이들은 밤이 되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호텔 로비로 들어가다가 경비원에게 쫓겨 현관 등에서 간신히 몸을 웅크린 채 하룻밤을 지내곤 한다.

이들의 눈에는 최근 법과 질서를 회복키 위해 증강배치된 경찰들도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며 급진파와 보수파간의 정치투쟁 역시 한낱 우스갯소리에 불과한 듯 외면한 채 오로지 민생고의 해결을 원하고 있다.

이들을 바라다보는 모스크바시민들의 표정 역시 남의 일이 아닌 성싶은 듯한 기색이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 있는 크렘린궁과 러시아호텔의 지붕에서는 하루 종일 보일러를 땐 수증기가 차가운 하늘을 뚫고 쉬지 않고 뿜어나오고 있다.

특히 소련내 일급 호텔 중 하나인 러시아호텔측은 서울이었으면 당연히 시당국 등에 항의,외국인들의 눈에 볼썽 사나운 이같은 모습을 즉시 없애도록 요청하겠지만 오히려 이들 빈민들의 생활을 방치한 채 호텔 투숙 외국인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는 엉뚱한(?) 행동마저 보이고 있다.

많은 외국인들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소련의 이같은 모습이 과연 세계 최강국의 진실된 면모인지 자문자답을 하고 있다.

위대한 러시아­차르의 영광과 볼셰비키 혁명의 기수인 이 나라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도 장래를 예측키 어려운 상황에서 오직 유일한 희망은 올 겨울이 예년보다 춥지 않기만 바란다는 말을 모스크바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다.

그러나 겨울은 벌써 깊어만 간다.<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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