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권력의 핵심인 크렘린궁과 무려 3천여 개의 객실이 있는 소련 최대의 호텔 중 하나인 러시아호텔 사이 공터에는 외국인들로서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영하의 날씨 속에 구경거리로 등장하고 있다.지난 수 개월 전부터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한 무주택자들이 정부당국에 대한 항의표시로 붉은 광장과 크렘린궁이 보이는 러시아호텔 뒤편에 간신히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비닐과 나무조각 등을 엮어 집단노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약 1백여 명 남짓한 이들은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까지 딸린 채 정부측에 살 곳을 마련해달라며 플래카드와 각종 문구 등이 쓰여진 종이조각을 내걸고 투쟁하고 있다.
이들은 밤이 되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호텔 로비로 들어가다가 경비원에게 쫓겨 현관 등에서 간신히 몸을 웅크린 채 하룻밤을 지내곤 한다.
이들의 눈에는 최근 법과 질서를 회복키 위해 증강배치된 경찰들도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며 급진파와 보수파간의 정치투쟁 역시 한낱 우스갯소리에 불과한 듯 외면한 채 오로지 민생고의 해결을 원하고 있다.
이들을 바라다보는 모스크바시민들의 표정 역시 남의 일이 아닌 성싶은 듯한 기색이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 있는 크렘린궁과 러시아호텔의 지붕에서는 하루 종일 보일러를 땐 수증기가 차가운 하늘을 뚫고 쉬지 않고 뿜어나오고 있다.
특히 소련내 일급 호텔 중 하나인 러시아호텔측은 서울이었으면 당연히 시당국 등에 항의,외국인들의 눈에 볼썽 사나운 이같은 모습을 즉시 없애도록 요청하겠지만 오히려 이들 빈민들의 생활을 방치한 채 호텔 투숙 외국인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는 엉뚱한(?) 행동마저 보이고 있다.
많은 외국인들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소련의 이같은 모습이 과연 세계 최강국의 진실된 면모인지 자문자답을 하고 있다.
위대한 러시아차르의 영광과 볼셰비키 혁명의 기수인 이 나라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도 장래를 예측키 어려운 상황에서 오직 유일한 희망은 올 겨울이 예년보다 춥지 않기만 바란다는 말을 모스크바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다.
그러나 겨울은 벌써 깊어만 간다.<모스크바에서>모스크바에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