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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칙없이… /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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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칙없이… /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0.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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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12월27일에 발효한 이른바 유신헌법 부칙에 이런 조항이 있다.『비상국무회의에서 제정한 법령과 이에 따라 행하여진 재판과 예산,기타 처분 등은 그 효력을 지속하며,이 헌법 기타의 이유로 제소하거나 이의를 할 수 없다』(부칙 제7조)

80년 10월27일에 발효한 5공헌법 부칙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과 이에 따라 행하여진 재판 및 예산,기타 처분 등은 그 효력을 지속하며,이 헌법 기타의 이유로 제소하거나 이의를 할 수 없다』(부칙 제6조)

신통하게 똑같은 이들 법조문은 4공과 5공헌법의 뿌리가 한갈래임을 말해 준다. 그 뿌리란 바로 헌법파괴로 비롯된 변칙이며,「비상국무회의」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초헌법적인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소산은 통상의 헌정질서 아래에서는 어떠한 법적 시련도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고,그래서 어떠한 이유로도 「제소」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또다른 변칙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런 변칙 덕분에 「비상국무회의」나 「국가보위입법회의」 활동 결과는 기정사실로 될 수가 있었다. 그렇지를 않았다면 「제소」와 「이의」가 잇달았을 테고,그탓으로 「일파만파로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가져올 위험」이 생겼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4공·5공의 세월을 되돌아 보며,국민으로서 「제소」도 「이의」도 못하는 그런 변칙이 현명했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6공헌법은 여야는 물론 국민적 합의위에 바탕한 것이라서,앞에 본 것 같은 변칙조항이 없다. 오히려 6공정부는 「제소」와 「이의」를 막기보다는 「5공청산」을 정권발족 초기의 한 과제로 내걸만큼 떳떳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처럼 떳떳하게 내걸었던 「5공청산」과제의 이행 결과 또한 당초의 표방만큼 떳떳한 지는 아무래도 미심쩍다. 더구나 오늘에 와서는 4공과 5공 헌법의 변칙조항 비슷한 발상이 정부안에 있는 듯 해서 놀랍다.

이것은 24일 정기국회 본회의의 질문·답변,28일 국회 문공위 국정감사에서 요즘 잇따르고 있는 언론송사를 두고 밝힌 최병열 공보처장관의 소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가 밝힌 소신의 요점은 언론통폐합의 뒤처리는 사법판단에 맡긴다는 것,그러나 그 판단의 향방을 따라서는 「일파만파로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새삼 4공과 5공 헌법의 제소·이의 금지변칙이 생각난다.

얼핏 듣기에 송사가 있으니 사법판단에 맡긴다는 최장관의 말은 퍽 상식적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정부 스스로 인정한 언론통폐합의 불의를 정부 스스로는 광정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 된다.

교과서 같은 말이라 안됐지만,민주주의 법치체제의 한 요체는 그 안에 자기광정장치를 포함한다는데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헌법에 규정한 국가배상청구권(제29조),이에 근거한 국가배상법이 그 보기이다. 이 청구권은 소송에 의하여 실현될 수도 있지만,그에 앞서 정부 스스로의 국가배상심의를 거치게 하는 것은 자기광정을 위한 장치인 것이다.

최장관의 언급은 그런 민주 법치의 정신과 어긋나고,「5공청산」이라는 정권차원의 정치공약과도 어긋난다. 또 배상심의위의 절차가 진행되기도 전에 「기각」결정을 전제로 사법판단 운운하는 것은 공보처장관의 소관을 넘어선,있을 수 없는 예단이다. 그렇게 일방적인 예단이 가능하다고 한다면,국가배상 절차에 대한 신뢰성은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정부의 도덕성에도 금이 갈 수 밖에 없다.

나아가,최장관이 「일파만파의 혼란」 운운한 대목은 더 심각한 함축을 지닌다. 그의 말을 부연하면,언론송사에서 정부가 이기는 경우는 별일이 없겠으나,정부가 패소할때는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된다.

얼핏 이 말도 상식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법판단을 기다린다면서,그 판단에 따라서는 엄청난 후유증이 있을 것임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또 그가 말하는 「정치적·사회적 혼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듣기에 따라 이 말은 사법판단에 대한 간접적인 간섭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설마 협박은 아닐테지만,저어한 생각을 금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언동은,행정부의 일원으로서는 삼갔어야 옳은 것 아닌가. 이런 언급이,요즘처럼 사법부 수장의 하마평이 요란할 즈음에 나온 것도 너무나 공교롭다.

아무래도 언론 주무장관은 지금의 언론송사를 좀 다른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첫째는 언론통폐합이란 불의의 원인제공자는 어디까지나 정부이며,이를 광정하자는 측을 혼란의 원인제공자로 몰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불의를 스스로 바로잡는 노력을 외면함으로써 야기할 수도 있는 더큰 혼란을 생각해야 마땅하리란 것이다. 이 경우 최대의 금물은 실무차원을 넘지 못하는 조작 또는 공작적인 발상이 아닐까 한다. 제소·이의 금지의 변칙이 없이 떳떳하게 내걸었던 「5공청산」공약은 역시 변칙없이 떳떳하게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뜻이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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