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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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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6

입력
1990.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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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 출국” 탄원서 내자 즉각 허가/흐루시초프 방문전 추방 계산/“충성맹세” 반성문도 끝내 허사 /국경선 넘으며 김일성 저주… “다시는 안온다”/폭동 「진압계획」이 「음모」 둔갑… 연안파 제거열차를 타고 함흥으로 가면서 나는 함경남도 도당 간부부로의 파견장과 편지를 보물단지라도 되는듯이 품속에 소중히 간직했다.

나는 이 서류가 사상검토를 받으면서 시작된 8개월간의 모진 시련에 종지부를 찍는 복권명령서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함흥에 도착해 도당 사무실을 찾아갔을때 마침 위원장은 외출중이어서 부위원장을 만나 파견장과 밀봉된 편지를 전달했다.

이 부위원장은 내가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는듯 깍듯이 존대를 해가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먼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며 『위원장과 상의할테니 사흘후에 다시 와달라』고 말했다.

나는 도당 사무실 부근 여관을 숙소로 정하고 약속한날 다시 도당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전에 만났던 부위원장이 갑자기 태도가 달라져 반말로 『며칠 더 기다리라』고 말하는등 극히 오만스럽게 나를 대했다.

그는 내가 『여비가 떨어져 오래 머무를 수 없다』고 사정을 설명하자 『그런 일은 우리가 다 해결해 줄텐데 무슨 잔말이 그리 많냐』고 벌컥 화를 내기도 했다.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그의 태도가 돌변한 까닭을 곰곰 생각해 봤다. 문득 내가 전한 편지가 소박한 내 기대와는 달리 내가 숙청을 당한 불순분자라는 점을 알리고 어떤 해를 가하라는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실제로 내가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 편지는 내가 「반당·반혁명분자」라는 것을 통보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편지가 나를 어떻게 「처리」하라고 지시했는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이 낯선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처형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이미 앞서 설명했던 허가이와 김두봉의 최후가 그러하듯 당시 북한에서는 숙청된 고위인사가 외딴 곳에서 의문스런 죽음을 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들이 떠올라 그길로 평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평양에 돌아와도 여전히 살길이 막연했기 때문에 나는 마지못해 김일성에게 반성문을 써 보냈다. 나는 이 반성문에서 『군사사업에 치중하느라 정치사업을 소홀히 했다』고 자인하고 『다시 일자리를 준다면 항일혁명 투쟁을 함께 했던 의지로 충성을 다해 일하겠다』고 호소했다.

나는 김일성이 이 반성문을 직접 읽고 나에게 일자리를 주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으나 종무소식이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김일성은 군부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나를 더욱 불안케 했다. 모든 사람들이 『오늘은 누가 숙청대상이 됐는가』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며 불안에 떨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또 이때 나는 연안파인 김웅 전선사령관,장평산 4군단장,왕연 평양 항공사령관 등이 군사폭동을 음모한 혐의로 체포,숙청됐다는 말을 뒤늦게 전해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일성이 연안파를 숙청하기 위해 조작해낸 가증스런 음모이며 나도 직접적으로 간여돼 있었다.

내가 아는 이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내가 소련 유학을 떠나기 전인 56년 중순께 당시 총참모장이던 김광협은 그의 사무실에 군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비밀회의를 열었다.

빨치산 출신인 김광협은 6·25 개전당시 무정에 앞서 제2보조지휘소 사령관을 맡았다가 전쟁이 시작되면서 참모장으로 강등됐으나 53년 다시 남일에 이어 총참모장으로 승진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물이다. 이날 회의에는 장평산과 왕연도 참석했다.

김광협은 이 회의에서 북한에 반정부 폭동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한 폭동진압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영문도 모르고 회의에 참석했던 나는 『작전국장에게 상의도 없이 무슨 폭동진압계획을 세우는가』라고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때 마련된 폭동진압계획이 뒤에 연안파를 숙청하는 「군사폭동계획」으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김일성은 이 서류를 근거로 김웅을 주모자로 한 장평산·왕연 등 연안파 군간부들이 평양과 원산에서 항공기까지 동원,쿠데타를 기도했다고 뒤집어 씌웠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자연히 나도 그 모략에 포함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을때 내 친구인 인민군 공병국장 박길남이 찾아 왔다. 나처럼 사상검토를 받았던 박길남은 『지금 김일성이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된 숙청자 명단을 갖고 있는데 첫째 부류는 처형하고 둘째 부류는 무기한 고생을 시키며 셋째 부류는 외국으로 간다면 쫓아 내는 것』이라며 『우리는 셋째 부류에 들어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소련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소련에 친척이 있으니 그곳에 돌아가 살겠다』는 탄원서를 당에 보냈다.

당에서는 이 탄원서를 받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내일 당장 출발하라』고 허락했다. 그들이 내 출국을 이처럼 반긴 것은 당시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이 중국을 방문한데 이어 평양에 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골치아픈 소련파인 나를 흐루시초프가 오기전에 쫓아내려는 계산에서였다.

나는 출국허가를 받자 소련 영사부를 찾아가 상의했다. 그들은 『주거는 제공할 수 있으나 돈을 다소 준비해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나는 애지중지하던 군복등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모두 팔아 북한돈 20만원을 마련한뒤 59년 12월 드디어 소련으로 출국했다.

이때 나처럼 숙청을 당해 반강제로 소련으로 쫓겨난 사람은 가족들을 포함해 무려 4백명이 넘었다. 지금 기억나는 사람만도 공병국장 박길남 중장,정찰부국장 윤성복 중장,인민무력성 총정치국장 최종학 대장,인민무력성 부국장 김칠성 소장,김재욱 중장,기석복 중장,한일무 중장,무력성 병기국장 천이환,해군 군관학교장 이세호 대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의 형 유성훈도 내가 북한을 떠날때 사상검토의 덫에 걸려 있었다.

내 형은 46년 소 군정시절 북한건국을 돕기 위해 대거 들어온 소련출신들과 함께 북한에 들어왔다. 그는 처음 노동당과 북한 정부관리를 양성하던 사동간부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이어 47년 김일성대학이 창설되자 초대 부총장에 임명됐다. 이때 총장은 연안파 지도자인 김두봉이었으나 그는 명목상 총장직을 맡았을 뿐 실제로 형 유성훈이 총장역할을 했다.

그는 평소 김일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편이었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김일성이 정치를 너무 모른다』고 걱정을 한 적도 있었다. 또 그는 허가이와 막역한 사이였다.

이런면에서 그가 숙청대상이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형 유성훈에게 사상검토의 올가미를 씌운 구실은 57년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승진된 그가 교수봉급이 10원 인상되자 『국수 두그릇 값이구만』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사상검토에 너무 시달린 탓에 간염까지 걸렸다. 그는 나처럼 61년 소련으로 쫓겨났으나 간염이 악화돼 66년 그루지아 휴양소에서 쓸쓸히 최후를 마쳤다. 이처럼 김일성은 우리 형제를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

45년 9월 해방된 조국을 위해 무언가 값진 일을 해보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북한에 들어왔던 나는 결과적으로 14년간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한뒤 허무하게 소련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소련국경을 넘으면서 수없이 김일성을 저주했으며 그가 살아있는한 북한땅을 다시는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나는 금년 5월 29년만에 북한땅을 다시 밞음으로써 스스로의 맹세를 깨뜨리고 말았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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