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하워는 두 번째 임기만료를 1년쯤 남긴 59년에 가서야 대통령직과 대통령의 권력을 만각하게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때부터 새로운 영도력과 이미지를 정립코자 했지만 3선이 금지된 이상 그같은 시도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의 한 측근은 아이크는 노르망디작전 때와 같은 신념을 갖고 대통령직에 취임한 것 같아 보였다고까지 술회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군인으로 원수까지 된 아이크는 평가되는 전투는 「마지막 전투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대통령에 취입,58년 이후 전쟁(그의 8년 임기)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아이크에게는 마지막 전투기회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자리에 앉아만 있었던 무능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정치전쟁에 있어서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최종이 아닌,최초의 몇몇 전투에 의해 결정나게 마련인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트루먼은 달랐다. 취임초 거인 루스벨트의 「신발 속의 소인」 같았던 이미지에도 불구,지도자의 자조능력과 정신자원 즉 권력감각ㆍ단호함ㆍ역사에 대한 방향감각 등을 재빨리 익혀 정보와 정책대안을 자신에게 집결시켜 대통령직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다. 루스벨트가 타고난 정보수집과 활용가였다면 트루먼은 천성이 판사였다는 말을 남겼다. ◆트루먼은 대통령이란 자리는 「책임전가가 끝나는 곳」 「정책결정을 하고 정책을 선도하는 곳」으로 인식했다. 그는 결정을 미루면서 「만일…」 「그러나…」 등으로 변명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질서와 책임의식을 요구하기에 앞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먼저 실천해나갔다. 그래서인지 그는 재직시에는 별 인기가 없었지만 사후에 미국의 5대 명대통령 서열에 오르는 평가를 뒤늦게 받게 됐다. ◆우리의 노 대통령은 어떤 형에 속할까. 대통령이 아닐 때 그의 「6ㆍ29선언」은 분명히 트루먼의 「히로시마 원폭투하결정」에 필적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ㆍ13 범죄전쟁선포」는 아이크의 대통령으로서의 노르망디작전 구상과 같은 때늦은 것은 아닐는지. 집권초에 했어야 할 일들을 임기 절반 이상을 넘긴 후에 손대려는 것은 정치를 전쟁처럼 생각한 탓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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