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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본 변혁의 현장/동구의 겉과 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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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본 변혁의 현장/동구의 겉과 속:하

입력
199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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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전면 거부」 세대간 갈등/“자본주의 철없이 동경”에/“이념보다 삶의 질이 중요”/상호 불신은 없어… 한국의 좌경논쟁 연상지금 양식있고 소신있는 기성세대는 민주혁명이 사회주의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나타나고 있는데 대해 적이 당황하고 있다.

특히 체코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바랐던 민주세력들은 호네커 체제의 붕괴를 환영하면서도 이 붕괴가 인간적 사회주의 이상마저 붕괴시켜 버리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민주혁명이 예상외로 급속한 조국통일에로 나아가게 되자,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바람직한 대안으로 여기고 있던 지식인들은 통일이 서독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마저 느끼고 있는듯 하였다. 동서독의 독일인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 대화를 하면서 민주적으로 정치적 통일과 사회적 통합을 해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독이 일방적으로 동독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있다고 그들은 비판하였다. 바로 이같은 「비민주적 통합」과정에 대해 동독 민주세력중에는 분개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듯하였다. 그들은 「군대의 진주없이 점령을 당한 기분」이라고 표현하였다. 동독의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서독은 지금 동독을 흡수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비판은 민주화에 동조했던 동독 기독교지도자들 가운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동독사회를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하에서 인간화하려 했던 지식인들 사이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지식인이나 종교인들과 달리 젊은이들과 일반 시민은 대체로 서독에의 한 일방흡수라 하더라도 그같은 통일을 환영하는 듯 하였다. 통일로써 그들은 어려가지 소망을 한꺼번에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첫째 통일로 인해 비로소 전후체제가 종식되고 독일의 주권이 확립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고,둘째로 국민(Volks)을 객체로 취급해온 스탈린체제가 붕괴되어 서독과 같은 개방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며,셋째로 무엇보다도 생활수준이 서독과 같이 향상될 수 있을 것이기에 소망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국민들의 낙관주의는 이미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면서 진행되는 통일과정의 현실 앞에서 무분별한 낙관주의로 비치는 것 같아,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기었다. 동독인들중 실업한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보수적인 기민당을 진보적인 사민당보다 더 선호하는 사실과,지난 동독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다섯사람의 주지사중 세사람이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라는 사실 등이 사려깊고 분별력있는 동독인들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

체코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독에서도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는 어떠한 성격이든간에 배격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그들은 제3의 길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회보장제도를 갖추고 있는 오늘의 서독체제를 인간의 얼굴을 갖고 있는 자본주의체제로 보아 대체로 그것을 수용하려 하고 있으며,그전에 한번도 실현해 보지 못했던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마저도 배격하는듯 하였다.

라이프치히에서 우리는 마지막 간담회를 그곳 신학대학 교수 두분과 대학원 조교들과 함께 가졌다. 우리 일행중에 어떤 분이 이렇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동독 교회를 보니 사회주의체제하에서 더욱 그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독일이 자본주의로 통일되었으므로 자본주의적 요소가 교회안까지 스며들면 그 순수성이 훼손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이에 대해 대학원 학생은 딱 잘라서 이렇게 응대했다.

『여러분은 독일문제를 사회주의대 자본주의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만 보려하는데 우리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사람답게 살게해 주는 체제와 제도가 더 중요하다. 그것의 이념적 성격이나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은 우리가 자본주의 밑에서 오염되고 불순해질까봐 염려하는데,그러한 염려는 우리에게는 사치스럽게 들린다.

우리의 이른바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다시 스탈린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거의 분노에 찬 절규처럼 이 청년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젊인이들의 열망에 대해 나이 많은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염려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었다.

『저 젊은이들은 자본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생각하는 것이므로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나는 문득 『요즘 젊은 놈들은 6ㆍ25를 겪어보지 못해 공산주의의 잔학상을 몰라 저렇게 좌경세력으로 떨어지고 만단 말이야』라고 우리 젊은이들을 꾸짖는 우리의 일부 기성세대를 연상하게 되었다. 얄궂은 대조였다. 지구 한쪽에서는 자본주의의 고약한 맛을 못보았기에 자본주의를 철없이 동경하고 경솔하게 수용한다고 한다면,지구의 다른 한곳에서는 공산주의의 악랄한 모습을 체험해 보지 못한 젊은이들이 좌경급진세력이 되어 계급혁명이나 주체사상의 노예로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두 젊은이 집단은 서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토론함으로써 서로 배워야 할 것으로 느꼈다. 그런데 이같은 경향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비극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세계가 바야흐로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민주화ㆍ평화화ㆍ평등화ㆍ자연과의 조화로 나아가고 있는데,아직도 한반도는 냉전구조속에 떨고 있는 수인처럼 갇혀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구에서는 제3의 길을 아직도 대안으로 믿는 기성세대와 제2의 길(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만을 선택하려는 젊은 세대간에는 냉전적 불신이 없다. 다만 어른들이 염려할 뿐이고,그런 염려를 젊은 세대가 경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길을 걷고자 하는 젊은 급진세력과 자본주의체제 옹호론자들간에는 무서운 냉전적 불신과 증오가 존재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우리의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북방정책은 성공하지만,그 성공이 북한정책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북방정책인가를 다시 물어야 할 시점에 왔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의 통일실현엔 도움이 되지 않는 북방외교가 과연 정당하고 필요한가를 새삼 묻게 되었다. 이 여행으로 우리의 못난 얼굴,그 비극적 역설을 다시 한번 거울을 통해 보는 것같아 가슴이 쓰라렸다.<한완상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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