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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먹은 약속/유영종(아침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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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먹은 약속/유영종(아침조망)

입력
1990.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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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 내분을 가라앉힌 것은 청와대 발표문이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이 만난 뒤에 나온 발표문 내용은 8개항이다. 국민이 반대하는 내각제개헌은 안한다는 것을 뼈대로 당내분 수습을 주로 다뤘다.창당정신 당원결속 기강확립 같은 것은 그야말로 당내문제일 뿐이다. 8개항 가운데 그나마 눈에 띄는 대목은 제7항­. 「양인은 당이 앞장 서서 제반 민주개혁을 추진하고 국가보안법 안기부법 지자제법 경찰관계법 등 민주개혁 입법을 조속히 처리키로 했다」는 것이다.

「까먹은 숙제」가 갑자기 떠오른 것 같다. 민주화 개혁이 새로운 약속으로 등장한 셈이다. 국민의 입장에선 약속의 재약속 또는 약속의 재발견이라고나 할까. 어떻든 정치지도자들이 새삼 관심을 표명하고 조속처리의 의지를 밝힌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뜻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개혁조치를 맡아 처리할 민자당의 그후 행태는 발표문과 거리가 너무 멀다. 당내의 기강과 사조직 문제로 계파끼리 어울려 수근거리지,구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논쟁이나 노력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까먹은 숙제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로 또 덮어 두고 가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민주화 개혁은 현 정권과 국민과의 굳은 약속이다. 6공 정부는 이 과제를 안고 출범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한다」는 6ㆍ29선언과도 연계 된다. 「기본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한다. 정부는 인권침해 사례가 없도록 특별히 유의하여야 하며 민정당은 변호사회등 인권단체와 정치적 회합을 통하여 인권침해 사례의 즉각적 시정과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등 실질적 효과 거양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제도적 개선」의 촉구는 바로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4당체제로 열린 현 국회는 개원초기엔 개혁무드가 상당히 활발하고 높았다.

완고한 일부 기득권층을 제외하면 개혁입법의 원칙엔 별로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슬슬 열의가 식어 간다. 국정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 났다. 민주화에 시효가 있는 것은 아니다. 추진이 무디고 더디기만 하다. 3당 합당 이후엔 실종상태나 다름 없다. 민주화가 계속 추진중인가,계속 조정기에 머물러 있는가 헷갈린다는 의견도 들린다.

만족할 수는 없으나 민주화는 추진중이다,그보다 더 시급한 난제가 많으니 후순위로 미룰 수 밖에 없다 함은 핑계에 불과하다. 제도의 보장이 없는 개혁이나 민주화는 공염불일 따름이다. 정부는 국회에 미루고 국회는 정부의 의지 탓이라고 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책임회피라 할 것이다.

민주화 개혁은 우리 내부의 체제정리와 대외적인 우위성 확보를 위해 꼭 실현시켜야할 시대의 사명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대북관계ㆍ북방정책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한다. 개혁의 속도와 폭을 어느정도에서 조절하느냐는 또다른 문제이다. 실약은 불신이라는 후환을 낳는다.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면 국민은 정부를 믿지 못한다. 딱 부러지게 되는 것은 되고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해야 의심이 걷히고 흔쾌하게 따르게 된다. 제도개혁의 지연과 실약을 쉽게 보면 큰일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의 팽배가 지금 어떤 상황을 연출하고 있나 꿰뚫어 보아야 한다.

요즘 바람 잘날이 없다. 거대여당이 회오리를 일으키더니 안면도의 반핵시위는 공포와 충격을 한꺼번에 몰고 왔다. 이런 자극적인 상황은 바로 불신의 관계에서 연유한다. 여당안에서도 신뢰감이 없다. 안면도 주민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거듭되는 실약의 대가를 이토록 무섭게 받아야 하는 것이다. 신뢰가 없는 전진은 불가능하다.

민주화만이 최선이고 만사형통하리라는 단순논리를 강변하고 나서자는 것은 아니다. 가시적인 개혁이 단행되고 성공해야 사회안정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정치권이 합심해서 하나의 약속이라도 똑바로 지킨다면 신뢰구축의 기반은 잡혀 나갈 것으로 믿는다. 약속을 안지키기 때문에 국정은 흔들리고 목표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성만이라도 확고하게 보여주면 지금같은 표류는 면할 수 있을줄 안다.

상기할만한 한마디가 있다. 노태우 후보는 「믿어 주세요」라는 약속을 거듭하며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공약 공언,실약 위약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투표인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은 구호이며 공약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불신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믿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집권층이 「앞장 서서 제반 민주개혁을 추진한다」는 새로운 약속과 맹세를 실천에 옮기는 길 뿐이다. 이만한 결의라면 숨기고 감출 일도 없다.

탁 털어놓고 국정을 펴가면 된다. 의심 받을 일은 애초부터 손을 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뢰회복은 민주개혁의 「까먹은 숙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달렸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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