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특별독립저격여단」-이는 1942년 여름 소련 극동군사령부가 일본에 대한 정보수집과 게릴라 활동을 목적으로 하바로프스크 북서쪽 80㎞ 떨어진 산림지대인 브야스크에 창설한 특수훈련부대의 이름이다. ◆부대 인원은 2백여 명으로 만주에서 항일전을 벌이다 관동군의 토벌작전에 쫓겨 소련령으로 넘어온 조선인(60여 명) 중국인(1백여 명)과 소련인들로 구성됐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같은 연유로 들어와 이 부대의 1대대장을 지냈다. 대대라 해서 6∼7백여 명의 정규편제가 아니라 20명 정도로 소련 교관으로부터 독도법 교량파괴 후방침투 낙하산훈련 무전기 조작술 등을 교육받았다. 김은 이곳서 근 5년간 있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함께 있던 최용건 강건 김책 최현 이동화 등과 함께 45년 9월19일 소련군 대위 복장을 하고 프카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입항,귀국한 것. ◆그러나 8ㆍ15 후 지금까지 북한에서는 「88여단과 김 대위」에 관한 기록이 일체 없다. 그것뿐인가. 1930년대 김이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항일련군의 1로군(총사령 양정우) 2군6사장을 지낸 것도 기록을 금지했다. 김의 경력을 14세 때인 1926년 「주체사상」을 창시했고 「절세의 용장」이자 「천재적 전략가」로 있지도 않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일본군을 무찌르고 8ㆍ15 후 압록강을 건너 개선한 「위대한 장군」으로 날조했기 때문에 중국과 소련군에 소속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를 아무리 날조를 해도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재소 조선인 3세로 88여단에서 김의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고 북한 정권수립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역임했던 유성철옹(73세)이 88여단 시절의 김의 동정과 또 훗날 김의 지시로 6ㆍ25 기습남침의 작전계획을 수립했음을 생생하게 증언한 것이다(한국일보 1일자부터 연재). ◆지금까지 88여단 관계는 단편적으로 소개됐었으나 김의 측근인사가 직접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매우 귀중한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일제 때 무장 항일투쟁은 모두 자신만이 한 것으로 역사를 날조한 김일성이 유씨의 증언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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