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 남침 「선제타격계획」 내가 짰다”/소 승인받고 한달 전 기안/“서울 점령하면 종전” 판단6ㆍ25당시 북한 인민군 작전국장으로서 남침계획을 직접 기안한 재소 교포 유성철 전 중장(73)은 31일 『내가 기안ㆍ작성한 남침계획의 정식명칭은 「선제타격계획」이었으며 이는 당시 소문에 떠돌던 이승만 정권의 북침설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고 증언,북한의 남침전모를 최초로 공개했다.
유씨는 또 김일성이 50년 3월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방문,남침계획을 논의했음도 재확인하고 최근 밝혀진 소련군의 한국전 참가가 중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공개했다.
유씨의 증언은 북한의 남침전모와 소련ㆍ중국군의 참전과정을 상세히 밝혀주고 있어 6ㆍ25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유씨는 6ㆍ25당시 인민군 중장으로 작전국장과 인민군 총참모장대리를 역임하면서 전쟁을 직접 지휘한 장본인이었으나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적 자세로 인해 숙청위기에 몰리자 59년 소련으로 망명,타슈켄트에 정착,지금까지 살아왔다.
유씨는 부인 김용옥 씨(60)와 함께 내한,이날 본사와의 단독회견을 통해 그동안 숨겨져왔던 6ㆍ25의 비밀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유씨는 이와 함께 지난 42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된 소련 극동군 산하 「88특별독립저격여단」에서 김일성과 함께 항일활동에도 참가,논란이 많은 김일성의 항일운동 행적과 김정일의 출생배경에 대해서도 결정적 증언을 했다.
유씨는 6ㆍ25 발발배경과 관련,『49년 이후 38선에서는 빈번한 남북간 군사충돌이 있었고 50년 여름 이승만 정권이 북침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 북한이 남침을 계획했다』며 『김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승인을 받은 뒤 50년 5월께부터 본격적인 남침계획을 준비했었다』고 말했다.
유씨는 『실질적인 남침계획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했으며 소련은 당시 군사고문단장을 대독전 경험이 있는 바실리예프 중장으로 교체했다』고 설명했다.
유씨는 소련의 남침안을 토대로 자신이 기안,작성한 남침계획서의 명칭은 「선제타격계획」이었다고 밝히고 『그 내용은 ▲전투명령서 ▲각군별 이동계획 ▲후방보장(지원)계획 ▲군사이동을 훈련으로 위장하는 계획 등이 포함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씨는 『남침작전은 2개 지휘소(군단)가 38선지역에서 동시공격하도록 짜여져 있었으며 서울을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판단,공격목표를 서울점령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유씨는 이어 소련ㆍ중국군의 파병과 관련,자신이 50년 10월당시 북한 외상 박헌영ㆍ상업성부상 이상조(주ㆍ소련 거주ㆍ89년 6월 내한한 바 있음) 등과 함께 중국을 방문,모택동에게 직접 파병을 요청했으며 소련군은 중국측이 미군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공군과 대공포병을 요청함으로써 참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씨는 『김일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정숙과 결혼,42년 장남 정일(소련명ㆍ유라)을 낳았다』며 『북한이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출생했다고 선전하는 것은 완전한 날조』라고 비난했다.
유씨는 『김일성 88여단에서 활동하다 일본이 항복하자 소련군 지시에 따라 나와 함께 선박편으로 원산항을 통해 북한으로 귀국했다』고 밝히고 『김일성이 두만강을 건너 게릴라활동을 펼치며 귀국했다는 것은 우스갯거리』라고 강조했다.<증언내용 5면>증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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