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4」이후 발언권 강화”예상 빗나가/“권력유지 수단” 당 정치교육 강화로 사기 저하/「천안문」진압 거부자 인사로 내부 갈등 증폭도/정책결정서 소외… 위상 격하지난해 6ㆍ4 천안문 유혈진압의 주역이었던 중국 군부의 현재 위상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천안문사태 직후 대부분의 서방관측통들은 천안문사태 진압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군부가 향후 중국 정치과정에서 발언권을 강화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은 천안문사태가 진압된지 1년반여가 가까워 오는 현재 시점에서 볼 때 단견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중국 군부는 그들이 진압한 「민주화운동세력」과 똑같이 중국의 정치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중국 군부대 최고실력자로 부상한 양백빙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겸 중앙군사위 비서장은 사태 직후의 예상과는 달리 여전히 정치국 바깥에 머물러 있고 또한 앞으로도 정치국 진입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양의 군부 장악을 후원했던 당의 원로그룹들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만 총구는 당의 관할하에 있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양의 정치국 진입을 극력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1일의 인민해방군 창설 63주년에도 군부에 대한 「홀대」는 노골적이었다. 인민일보는 국경일이면 표제글자를 붉은색으로 처리하던 관례를 무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홀대」는 천안문사태 직후에 치러진 62주년 기념행사가 극히 성대했었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 천안문 사태를 진압시킨 공에 대한 보상은 군현대화계획 추진 10년동안 매년 감소돼 왔던 국방예산이 처음으로 증액된 것이 유일하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군부의 위상격하는 천안문사태 이후부터 부활되기 시작한 군에 대한 정치교육의 강화 때문이라는 사실은 사뭇 역설적이기조차 하다. 복고적인 정치교육의 강화는 군이 당의 권력유지에 버팀목구실을 해야 한다는 논리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군이 철저히 당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으로 정치교육의 강화는 10년간의 현대화계획을 통해 국가를 방위하는 존재로서의 위상변화를 꾀하던 중국 군부에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정치교육의 강화와 함께 단행된 대대적인 인사개편은 군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군이 정치적 발언권을 높이는데 마이너스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지난해 천안문사태 기간중 고위장교들 사이에 「머뭇거리는」자세가 노정되었음은 부인못할 사실이다.
진압명령에 대한 군일부의 반발은 당시 서방언론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상호 적대적인 군부대들간의 무력충돌이라는 내란상태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군당국자들도 「소수의」장교와 장병들이 명령시행을 거부했거나 지연시켰던 사실을 이제는 시인하고 있다. 그것은 공산당 지도부와 강경군부 지도자들로 하여금 또 한번의 소요가 발생했을 때 군부가 계속해서 충성심을 보일 것이냐 하는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같은 판단하에 추진된 정치교육강화와 인사개편은 지난 10년간의 현대화계획의 성과를 무로 돌리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나올 정도로 대폭적이며 철저했다.
인민해방군 장병들은 매일 10시간의 일과중 6시간을 정치학습에 할애해야 했고 이는 군사 훈련스케줄에까지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지난 4월부터 5월까지 단행된 군 고급장교에 대한 대대적 인사개편의 중점목표는 당이 신뢰할 수 없는 군인들을 솎아내자는 것이었다.
양백빙의 직접 감독을 받는 조사관들은 천안문사태 진압 당시 미온적인 행동을 취한 것으로 간주되는 장성과 장교들을 철저하게 가려냈다. 인사개편 작업이 어떠한 원칙하에서 이루어졌는가는 지난 5월 인민해방군 총정치부의 「입」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군보의 사설이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해방군보는 『장교들의 정치적 행동을 조사함에 있어 매일매일의 행동뿐만 아니라 중요한 시기에 각자의 정치적 책무를 성실히 이행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 신문은 정치적 충성도보다 직업적 자질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과거의 인사원칙이 결과적으로 『결정적 시기에 자신의 본분에서 이탈하는 「개인주의자」들을 양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고급장교들이 해직되거나 퇴역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사태풍은 각 군구뿐만 아니라 군사학교 및 총사령부까지 두루 뒤흔들어 놓았다.
양은 이와 함께 군조직을 개편,자신의 손안에 군부권력이 집중되도록 조치했다.
중앙군사위 기율검사위의 기능을 총정치부로 이관한 것도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분석된다.
군부를 장악한 양은 그러나 두가지 다른 형태의 「견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하나는 군부의 정치적 발언권 증대를 우려한 당 지도부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양이 자신의 지지자들로 요직을 채운데 따른 군내부로부터의 반발이다. 전자로부터는 정책결정과정에 군부를 철저히 소외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양의 정치국진입이 좌절된 것과 군부가 치안문제 외에는 정책결정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 지도부의 군부견제의 구체적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군내부의 반발은 10년동안 추진돼온 군부개혁이 뿌리깊다는 증거이다.
북경의 외교관들은 군부에 대한 정치교육의 강화로 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으며 시대착오적인 양의 행동을 『폭풍우속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비아냥 거리고 있다.
그러나 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되고 있다고는 하나 중국의 현지도부가 권력유지를 위해 여전히 인민해방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현재의 정치적 안정이 깨질 경우,중국 군부가 중국의 정치적 미래를 좌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적 영향력은 저하됐으나 여전히 「잠재된 폭탄」으로서의 위상을 온존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 군부의 현주소인 것이다.<유동희기자>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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