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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공존의 틀 모색해야/남북총리 평양회담을 보고(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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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공존의 틀 모색해야/남북총리 평양회담을 보고(특별기고)

입력
1990.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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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총리회담이 끝났다. 우리측의 대표단과 수행원과 기자들도 개성과 판문점을 거쳐 무사히 돌아왔다. 무사했을 뿐 아니라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공식회의나 공개된 만남의 장소에서 주고받은 것보다 더 많은 얘기들이 눈짓과 손짓과 몸짓을 통해 서로 전달되었다.북한이 남쪽에 보여주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그 쪽의 설명이 없어도 분명했었다. 평양역에서 우리 대표단을 맞는 북측의 다소 냉랭한 영접은 북측이 아직도 전민족적 통일전선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남쪽의 반정부 세력과의 제휴를 평화통일의 지름길이라 믿고 있는 북측의 입장으로서는 임수경양 사건이 없었더라도 남측의 총리일행을 열렬히 환영해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통일의 방해세력인 남쪽의 집권인사들을 축구선수나 음악인과 같이 환대할 수는 없었음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기대하고 그 기대가 어긋났다 해서 실망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북측이 그동안 일관되게 유지해온 통일전략을 몰라도 한참 몰랐기 때문이다.

북이 일관성을 유지해온 대남 정책중의 또 하나는 「조선은 하나」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때문에 유엔 동시가입은 분단영구화이며 동시교차승인도 반통일적인 음모라고 주장해온 것이다.

연형묵 북한 총리가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평양에서도 공식회의 석상에서는 「총리」라는 표현대신 「수석대표」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상대를 총리라 부르면 상대 국가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가 아닌 두개의 한국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된다는게 북한의 입장이었다.

북한은 또한 두개의 한국이라는 현실은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루빨리 이를 타파해서 하나의 조국을 이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모든 지금의 어려움이 분단 때문에 야기된 것이기 때문에 분단의 극복과 통일의 성취만이 자유와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총리회담 이틀째 남쪽의 기자들이 평양의 어느 한 공장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북한 여성노동자들은 통일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 「통일이여 어서오라」를 울먹이며 외치는 그들의 표정에서 남쪽사람들이 감격하기에 앞서 당혹감마저 느꼈던 것은 그만큼 북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쪽 기자들을 위해 특별히 동원된 사람들이 아닌가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 북측 주민들은 모든 고통과 희생을 통일을 위해 인내하고 감수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정말 통일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통일은 북한 지도자들이 주민들에게 발행한 모든 약속어음의 만기일이 되는 날짜인 것이다.

그러나 평양의 총리회담은 이러한 북측의 과거부터 일관된 대남 자세와 정책을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단히 중대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점도 시사해 주었다. 남쪽의 대표단을 맞는 김일성 주석의 태도는 그에 대해 많은 남쪽 사람들이 가져온 고정관념을 깨뜨릴 만큼 부드럽고 정중하고 진실해 보였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말을 전했고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이미 개최 여부보다 언제 열리느냐가 문제라는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우리측 수석대표를 총리라 부름으로써 연형묵의 결례를 말끔히 지우기도 했다.

북한의 자세변화는 김일성의 태도에서도 그랬지만 연형묵의 제안내용에 있어서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표면화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첫째,교류와 정치군사문제를 동시 병렬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점,둘째,북측이 서울회담에서 고집스럽게 주장했던 3대 우선과제의 강도가 낮아졌다는 점,셋째,불가침선언의 내용이 달라졌다는 점 등에서 나타났다.

그동안 남측이 주장해온 교류와 개방은 북측이 받아들이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다. 분단의 벽을 열어 남북이 다양한 인적 물적교류를 실시하자는 남측의 주장은 주체사상으로 뭉친 북의 폐쇄체제를 허물고 남의 경제력으로 북을 압살시키려는 독일식 통일전략이라고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북측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전면개방과 교류는 북에 자살을 강요하는 극단의 행위였다.

불가침선언 문제도 과거에 북한이 내놓은 제안들은 하나같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고 미군이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군철수가 북한의 모든 대남 통일정책의 기본제제임을 반영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평양회담에서 내놓은 북측의 불가침선언 초안에는 핵이나 미군의 철수가 통째로 빠져 있다.

북측이 이번에 교류문제의 동시해결 의사를 표명한 것은 남북한 간에 협력의 가능성,특히 경제협력의 가능성이 상당히 커졌음을 뜻한다. 주변의 변화에 적응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김일성이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북의 대남 기본자세가 점진적 변화의 과정을 걷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북의 입장에서 보면 교류와 개방이 북한 체제가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통제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으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남측이 교류와 개방을 이용해 북의 몰락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조심스런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날의 대남인식의 틀이 너무나 일관성이 있고 강력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바꾸기를 기대할 수 없다면 앞으로도 북의 태도는 지속과 변화의 요인이 서로 혼재하는 모순된 양상을 보이면서 서서히 현실에 적응해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회담에서 합의사항이 문서화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12월11일에 열기로 합의된 3차 회담에서는 북의 불가침선언과 남의 기본관계선언을 합쳐 하나의 합의사항으로 묶을 수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북한 기본관계에 불가침 약속이 포함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양회담은 특정의 구체적 합의문서를 넘어 남북한의 기본 입장이 서로 조금씩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그 자체가 귀중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주장하고 요구할 것은 당당히 하면서도 북의 입장을 헤아려 주는 자상함과 인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북에 남의 체제인정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이미 북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문제는 3차 총리회담과 그후에 있을 정상회담에서 남북한이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구체적 조치들이 무엇인가를 강구하는 것이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닌 진실된 공존공영의 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인 것이다.<정종욱 서울대교수ㆍ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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