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이제 먼 곳이 아니다. 공존과 개방의 도도한 세계사의 조류가 평양과 서울을 가깝게 만들었다. 빈번한 남북 접촉은 같은 민족임을 확인해 주면서 평양을 낯설지 않게 해주고 있다.그러나 남북고위급회담을 취재하기 위한 평양행이 예사로울 수만은 없다. 45년간 분단을 지켜보고 있는 「단장의 벽」을 넘을 때마다 새로운 소회를 안겨준다. 한번 한번의 발걸음이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판문점을 지나 개성에서 기차로 3시간 길이라는 평양여정은 벌써부터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오늘 저녁은 평양에서 첫밤을 지내게 된다. 이 설렘과 함께 고위급회담이 갖는 중차대한 의미가 양 어깨를 짓누른다. 어쩔 수 없는 「그 무엇」이 뒤따르고 있다.
「광복의 기쁨」 속에서 태어나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온 기자로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환희와 비애가 혼효한 민족사적 격동의 회오리속에서 태어난 해방동이의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세계사의 조류는 문자 그대로 소용돌이치고 있다. 분단국가중 유일하게 민족재결합을 하지 못하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들은 이 소용돌이를 헤쳐나아가야만 한다.
서울에서 1차회담이 있었을 때 회담성사 자체가 큰 성과라고 했다. 그러나 평양에서의 2차회담은 그렇게 한가롭지가 못하다.
우선 1차회담이 끝난 뒤 한달이 채 못된 사이에 일어난 주변의 변화를 살펴보자.
우리와 소련이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고,북한은 일본과 관계정상화를 위해 뜀박질을 시작했다. 우리 축구팀이 평양으로 가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고,18일부터는 평양에서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개최된다.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과 북이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눈물을 흘려가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댔다. 몇년이 걸려도 힘들었을 변화들이 며칠 사이 우리들 눈앞에서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시야를 밖으로 돌려보자
냉전의 상징이던 분단 독일이 하나로 통일돼 이념과 체제가 구시대의 산물임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세계의 시선은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가 어떤 모습의 미래상을 설계해 나아가느냐에 모아지고 있다. 소련은 일본에 대해 북방 2개도서 반환을 검토하는 등 전후 냉전시대 청산작업은 날이 갈수록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양에서의 2차회담이 상징적 수준에 머물 수 있단 말인가. 서울회담에서 보여준 남북간의 견해차이는 마땅히 좁혀져야 하고 구체적 성과가 나와야만 한다. 유엔 가입문제를 비롯,인도적 교류와 경제교류 문제 등이 본격 논의돼,이 회담에 쏠리고 있는 7천만 겨레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
북한의 지도부가 급변하는 세계사적 교류에 부응할 만큼의 태세를 갖춰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민족이 결코 역사의 낙오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울을 떠나면서 국내정치상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기자의 마음은 참으로 서글프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파행의 국내정치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정국을 주도한다는 집권정당의 집안꼴이 말이 아니고,정국운영의 한 축인 제1야당 총재가 단식이라는 극한 투쟁을 하고 있다.
「일각이 여삼추」인 이 황금같은 시기에 언제까지 우리는 소모적 정치행태를 계속해야만 하는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는 급변하는 주변정세를 소화해낼 지가 의문인 데 말이다. 정말로 안타깝고 답답함을 지울길 없다.
가까워졌지만 처음 가보는 평양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다. 그리고 이를 독자들에게 알리겠다. 평양회담에서 「민족적 낭보」를 전할 수 있는 성과가 나온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출발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여러 상념들이 뇌리를 짓누른다.
평양,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1인 지배체제가 수립돼 있다는 북한이 개방의 세계사적 조류 속에서 과연 변하고 있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는데 간접체험으로만 알고 있는 북쪽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가을걷이가 끝났다는 북녘의 산하는 어떤 풍경일는지….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고,도전이 있는 곳에 응전이 있다고 했다. 해방동이 기자의 평양행이 분단의 과거를 청산하고 통일의 현재를 가져오기 위한 도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작은 바람이 축적돼갈 때 우리의 꿈은 한발짝씩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일을 서둘되 조급할 필요는 없다. 환상의 무지개만을 좇다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평양행을 앞두고 큰 기대를 하면서도 냉철한 현실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평양으로 열린 오솔길이 신작로가 될 때야만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은 언젠가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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