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국왕 “기회주의자” 냉대 받자/미ㆍ영등 방문 남편변호 발벗고 나서/자국 어려운 처지ㆍ아랍인 대미관등 설득 노력자타가 공인하는 중동외교의 명수인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이번 페르시아만사태에서 곤혹스런 입장에 빠지자 부인인 누르ㆍ알ㆍ후세인 왕비(39)가 적극적으로 내조외교에 나서 화제가 되고 있다.
빼어난 미모의 누르왕비는 선조가 아랍계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국인으로 지난 78년 16세 연상인 후세인 국왕의 4번째 왕비(3명의 다른 왕비는 이혼 또는 사망)가 된 이색적 경력의 소지자.
누르왕비는 이라크와 미국사이에서 줄타기외교를 벌여온 후세인국왕이 최근 미국으로부터 「교활한 기회주의자」라는 냉대를 받으며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남편을 변호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누르왕비는 이달초 영국을 거쳐 미국을 방문,미의회지도자ㆍ행정부관리ㆍ언론인 등 요로에 요르단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호소했다.
누르왕비는 미정책 연구기관인 브루킹스연구소에서 행한 연설에서 요르단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하며 유엔의 경제제재를 준수함으로써 교역과 관광수입에 막대한 타격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또 그녀는 남편이 미국과 이라크의 극한 대결을 막기위한 중재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감싸면서 현재 미국에는 「적이 아니면 동지」라는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다고 따가운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누르왕비는 인구의 절반이상이 팔레스타인인인 요르단의 험악한 국내분위기,석유와 재정수입을 절대적으로 이라크에 의존하는 경제상황,이라크ㆍ이스라엘ㆍ시리아 등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험성ㆍ난민유입문제 등을 설득력있게 설명했다.
할아버지가 시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던 누르왕비의 원이름은 리자ㆍ할라비. 프린스턴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한뒤 요르단 국영항공사에서 근무하다 우연히 항공사 행사에 참석한 후세인 국왕을 만나 일약 일국의 왕비가 됐다.
그러나 그녀는 모나코의 그레이스ㆍ켈리 왕비처럼 동화속의 신데렐라가 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부친이 미 최대의 항공사인 팬암사 사장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아랍의 최빈국인 요르단 왕비자리가 결코 매력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때문에 결혼은 그녀에게는 힘든 결단이었다.
대학시절 월남전 반대시위에 앞장섰고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활동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을 가진 자신이 규율이 엄격한 모슬렘국가의 왕비로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던 것이다.
반면 요르단내에서도 누르(아랍어로 빛을 의미)왕비의 「자격」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요르단이 아랍권에서는 가장 많이 세속화됐지만 아직도 미국적을 갖고 있던 카우보이 부츠와 블루진을 즐겨입는 누르왕비의 자유분방함은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89년 4월 물가폭등과 공직자부패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했을때는 누르왕비의 호사스런 생활과 비이슬람적 생활태도가 공격을 받기도 했다.
누르왕비는 이같은 비난에 개의치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생활양식과 모슬렘율법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그녀는 빈민구호사업과 여성인권신장에 남다른 열의를 보인다는 호평도 받고 있기도 하다.
누르왕비는 방미기간중 아랍인의 보편적 대미관을 미국인들에게 설득시키려고 특히 노력했다. 미군의 사우디주둔이 왜 아랍인에게 중세의 십자군전쟁과 근세의 식민지시대를 연상시키는지를 일깨워줬다.
누르왕비의 내조외교가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녀가 아랍인의 훌륭한 아내임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조상욱기자>조상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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