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변혁 외면 동독 안팎 궁지에/민주화 요구 탄압 체제 붕괴로 이어져/정세 변화 포착 서독선 외교로 뒷받침독일통일은 탈냉전시대를 마감하는 세기적 대사건이자 세계평화 및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는 계기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본보는 독일통일에 즈음,현지에 파견된 이원명박사(본사 통일문제연구소 연구위원)를 통해 독일통일의 원인과 그 배경을 긴급 진단해 보았다.<편집자주>편집자주>
독일통일은 지난해 11월9일 전후 유럽에 있어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중의 하나인 베를린장벽 붕괴를 계기로 하여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사실 베를린장벽이 와해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통일의 전망은 외적조건으로 보나 분단의 기본적 원인으로 보나 극동의 우리 한반도 통일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둡게 보였다.
독일분단은 우리 한반도 분단의 경우와는 달리 세계인류를 비극적 살육의 도가니로 휘몰아 넣은 2차대전의 전쟁도발이라는 역사적 책임뿐만 아니라 히틀러 나치정권의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유태인 대량학살이라는 도덕적 책임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야스퍼스,하버마스,골로만 등 독일의 저명한 지성들은 독일민족은 세계사 앞에 속죄하는 대가로 전후분단 현실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또한 천년의 기독교적 증세 보편질서를 뿌리채 뒤흔들어 놓은 30년 종교전쟁 이후 다채롭게 전개된 근대유럽 정치사를 조감해볼때 독일 주변국가들은 모두 유럽대륙의 심장부에 위치한 독일땅에서 국제정치적 헤게모니를 요구하게 될 강력한 통일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한결같이 반대해 왔다. 이처럼 독일분단은 불가피한 깊은 역사적 곡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밖의 유럽인은 물론이고 독일인들조차 어느누구도 독일 통일과정이 지금처럼 급속히 진전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민족이론을 내세워 분리정책을 고수한 호네커 치하의 동독이 지난 70년대 초에 기본조약을 체결,서독과 평화공존관계에 진입한 후 유엔에 가입하여 국제적지위를 공고히 하고 또한 세계 10대 공업국의 하나로 발전,동구공산권 가운데서 가장 높은 소득수준을 가진 사회주의국가로 성장하자 두개의 독일국가 존재가 독일땅 위에서 사실상 확고히 뿌리를 내린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밖에 미ㆍ소ㆍ영ㆍ불 등 4대 전승연합국이 2개의 독일국가 존재를 바탕으로한 전후 유럽의 현상유지정책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통일은 금세기중에 실현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으로만 간주되었다.
독일통일의 원인과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독 국가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대외적 및 대내적 요인,그리고 서독정부의 현실주의적인 통독정책 등 3가지 요소를 규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 동서냉전 상황속에서 동구 사회주의진영의 전략적 전방초소로서 창설된 동독 사회주의국가가 밖으로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 소련 사회주의체제의 혁명적 개혁을 표방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대두하고서 부터이다.
고르바초프는 1917년의 볼셰비키 대혁명과 함께 등장한 소련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점차 깊은 정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자 이를 재빨리 통찰,「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라는 마력적 슬로건아래 대내적으로 체제의 총체적 개혁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군축과 대 서방 개방외교를 들고 나왔다. 즉 붕괴일로에 있는 소련 사회주의체제의 회생을 위해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는 대외정책면에서는 민족자결원칙과 군축을 바탕으로 하여 전후 유럽 분단질서의 극복을 목적으로한 「유럽 공동의 집」 창설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서방자유국가들과의 경제협력관계를 질적으로 대폭 확대하고자 했다. 물론 이와 같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70년대 초 서독 빌리ㆍ브란트총리의 동방정책의 이니셔티브로 창설된 전유럽안보협력회의체를 주축으로 하는 동서 평화공존체제가 점차 유럽대륙에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75년 8월 알바니아를 제외한 전 유럽국가 및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35개 국가대표들이 헬싱키에 모여 전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문서에 서명했는데 이 최종문서에 유럽 안보구축 및 상이한 이념과 체제를 가진 국가간의 협력촉진을 위한 준칙으로서 제시된 신뢰구축과 군축,국가간의 경제ㆍ기술협력촉진,인권존중 등의 3가지 기본방침이 기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있어 전제가 되었다.
소련에서 일어난 「위로부터의 혁명」 즉 페레스트로이카 운동은 안으로 국가사회주의체제의 구조적 전환을 도모하고 밖으로 동구제국에 민족자결권을 허용함으로써 출범한지 몇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내에 요원의 불길처럼 동구 공산제국에로 번져나갔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국가들에서는 소련의 경우와는 달리 밑으로부터 세차게 일어난 평화적 혁명에 의해 스탈린주의적 국가사회주의체제가 청산되고 체제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분단국이라는 특수지위를 가진 동독의 경우 다른 어느동구국가보다도 먼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수용하는 전진적 자세를 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네커 공산정권은 오히려 시대역행의 코스를 향하고 있었다.
동구공산권에서 제1위의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성장하여 소위 사회주의 우등생이 된 호네커 당서기장 아래의 동독은 동독 사회주의체제가 페레스트로이카가 지향하는 목표를 이미 성취했다고 주장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역사적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스탈린주의적 국가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독식 사회주의」(Sozialismus in den Farben der DDR)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사회주의의 마지막 보루로 자처했다.
또한 서독과의 체제경쟁을 의식하여 호네커정권은 동독의 사회주의적 사회보장정책을 부각시켜 서독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동독 국가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작년 10월6일 동독 건국 40주년 경축식을 기해 동독수도 동베를린을 방문한 고르바초프가 동독 공산당 지도부를 향해 『너무 늦게 오는 자는 역사에 의해 벌받게 된다』라는 예언적 경구를 던지며 동독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조속한 개혁을 직접 종용했을때도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은 오히려 동독이 이룩한 업적을 과시하며 이에 반대했었다.
이처럼 체제개혁과 개방노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스탈린주의적 국가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한 동독 호네커정권은 폴란드ㆍ헝가리 등 이웃 동구국가에서의 페레스트로이카가 급속히 추진되어 본격적인 단계게에로 접어들자 마침내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져 결국 대외적으로 자기가 설 땅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동독 호네커 정권은 주변의 변화에 아랑곳없이 공산당의 독점적 지위를 전제로한 보수적인 국가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하면서 밑으로부터 일어난 민주적 체제개혁운동을 엄중히 탄압했는데 이는 결국 전후 40여년동안 유지되어온 동독 국가사회주의체제의 완전붕괴를 가져온 도화선이 됐다.
동독의 체제민주화운동은 폴란드ㆍ헝가리 등 동구 이웃국가에서처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고취되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이 운동은 자유연대노조를 중심으로한 폴란드의 체제저항적 개혁운동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코자 하는 작가ㆍ종교인ㆍ학자 등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 체제 비판적인 동독 지식인들은 고르바초프의 등장이전부터 이미 스탈린주의적 국가사회주의 노선을 신랄하게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민족의 어두운 분단현실을 고발해왔다
여기에 서독정부의 현실적인 통독정책이 통일을 촉진시켰는데 서독 기본법 제23조(동독이 주로서 가입을 원할 경우 편입을 규정한 조항)는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소련은 당초 이 서독 기본법 제23조에 따른 통독을 반대,독일통일은 큰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소련의 대독정책은 한국전쟁이 장기화한 1952년 스탈린이 제안한 독일 중립화통일안이 서독 아데나워정부와 서방 3강대국의 거부로 좌절된 이래 점차 두개의 독일국가를 승인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는데 이러한 소련의 두개 독일정책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왔었다.
그러나 전후 얄타체제를 대체하기 위한 고르바초프의 대 유럽 비전은 동독 호네커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베를린장벽의 개방으로 인해 독일 내부상황이 통일에로 급속히 움직여 나감에 따라 사실상 변경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소련의 대 유럽 및 대독정책이 그 기조에 있어서 전환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때 서독 연방정부 콜총리와 겐셔 외무장관의 적극적이고 생동적인 대소 통일외교가 개시되었다.
서독 콜총리는 고르바초프의 유럽 공동집 구상을 수용,포괄적인 독소 경제협력관계의 형성을 조건으로 『독일통일을 바탕으로 하는 유럽 공동의 집을 창설할 것』을 제의했다.
이러한 콜총리의 기본구상 제의를 출발점으로 하여 서독 겐셔 외무장관은 천재적인 대소 통일외교를 전개,결국 고르바초프로부터 서독 기본법 제23조에 따른 독일 통일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 이로써 독일 통일의 문은 전후 독일이 분단된지 45년만에 처음으로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독일통일의 외적 진행과정이 동서 양독간의 내적통일을 촉진시켰는가 하면 거꾸로 양독간의 내적 통일속도는 또다시 외적 통독 조건에 대한 강대국간의 국제협상을 촉진시켰다. 물론 독일통일의 내적ㆍ외적 진행과정을 추진시켜온 원동력은 독일민족의,특히 동독주민들의 통일의지에 있었다.<이원명 본사 통일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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