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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 급선회한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뉴스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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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 급선회한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뉴스메이커)

입력
1990.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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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맹주 야심으로 후세인과 뿌리깊은 앙숙/전투기조종사 출신… 국방장관때 쿠데타 집권제임스ㆍ베이커 미 국무장관의 13일 (현지시간) 전격적인 시리아방문은 「외교세계에서 영원한 적은 없다」라는 진부한 격언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시리아의 하페즈ㆍ알ㆍ아사드(61) 대통령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전까지만해도 아랍권에서 가장 반 이스라엘적이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가장 반미적인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은 여러건의 국제테러사건에 시리아가 깊숙이 개입됐다고 믿고 있다.

아사드의 초강경 반미자세는 아라파트 의장의 대미접근 시도마저 「덧없는 구애」라고 비난해 왔던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베이커장관은 시리아방문에 앞서 페르시아만 사태에서 시리아의 역할에 대해 기대를 표명하고 아사드대통령도 미국의 사우디주둔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누그러뜨리고 있어 베이커의 시리아방문이 미국 및 서방과 시리아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한층 짙어졌다.

아사드대통령의 이같은 「코페르니쿠스적 변신」은 오랜 앙숙인 이라크의 후세인대통령이 쿠웨이트를 침공,아랍세계의 맹주가 되려는 야심을 노골화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음이 분명하다. 시리아의 대 이라크 적대감이 얼마나 뿌리깊은 가는 이란­이라크전 당시에도 다른 아랍국과는 달리 리비아와 함께 이민족인 이란을 지원했던 사실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아사드의 대 서방 화해추구는 가깝고 당면한 적을 억제하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적과 손을 잡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사드 자신도 12일 다마스쿠스에서 있은 한 군사퍼레이드에서 『위급한 문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지만 미군의 사우디주둔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혀 변신의 한계선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사드 대통령이 이전처럼 대미ㆍ대 서방관계에 있어서 극도의 비타협적 자세로 복귀하지는 않을 것이다.

페만위기 이전부터 시리아는 소련이 더이상 무기공급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이집트를 통한 대 서방화해 모색을 조심스럽게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탈냉전이후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기에 이라크의 후세인이 아랍의 패권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아사드는 대 서방화해를 선택했고 이러한 대비가 이라크의 쿠웨이트침공으로 보다 선명해진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한 것이다.

아사드대통령은 29년 시리아의 주항인 라타키아근해의 키르다하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시리아의 소수파회교도인 알라위트파 출신인 그는 46년 아랍민족주의를 추구하는 바트당에 입당했으며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전투기조종사 출신. 바트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는 점에서 후세인 이라크대통령과 비슷하며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국가원수에 올랐다는 점에서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공통점을 갖는다. 국방장관으로 재직중이던 68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으며 85년 임기 7년의 대통령직에 3선됐다.

아사드의 집권은 4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20여차례의 쿠데타로 점철되었던 혼란한 시리아정국에 안정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인과 5남매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공식석상에서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드물어 「소화불량증에 걸린 얼굴」이라는 별명을 서방언론으로부터 받고 있다.<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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