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사나흘 동안 가장 흔하게 들은 말중의 하나가 「역사」였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남북총리회담」「력사적인 북남고위급회담」이 열렸으니,그것은 당연하다. 회담에 참가한 사람들이나,회담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5천년 민족의 역사를 언급하고,45년 분단의 역사를 되새겼다.역사란 「현실의 발전과 운동의 과정」이며,사물이 「존재하여 온 연혁과 경력」(북한과학원 언어학연구소=현대조선말사전)이다. 역사가 있음으로해서 오늘이 있고,그 역사에 바탕하지 않은 내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5천년 민족의 역사를 되짚어 민족의 통일을 역사적 필연인 줄로 알고,통일을 오늘 우리의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분단의 역사가 있은지 45년만에 처음으로 있은 남북총리의 만남을 역사적인 사변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역사의 잔치」를 치르고 난 지금의 심정은 결코 쾌청이 아니다. 다음 10월의 두번째 총리회담이 예정되고 있으니,서울의 첫번째 만남을 「조심스런 낙관」으로 결산하고 싶지만,솔직하게 말해서 「조심스런 실망」말고 다른말 덧붙일 것이 없다. 그것은 그많은 성명과 연설과 언동에 나타난 양측의 말이 너무나 다른 데서,또 설사 말이 같다고 해도 그 속뜻이 너무나 현격함을 깨닫는데서 연유한다. 그것은 「역사」와 「력사」라는 표기법의 차이 이상의 괴리를 실감하게 한다.
하긴 「역사」와 「력사」는 다르다. 표기가 다를 뿐 아니라 「역사」와 「력사」의 실체도 다르다. 역사가 있음으로 해서 오늘이 있고,그 역사에 바탕하여 내일이 있는 것이라면,「역사」와 「력사」의 다름은 매우 심각한 함축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분단 45년의 역사」와 「분단 45년의 력사」가 그러하다.
그 한가지 보기를,지난달 8월11일자 로동신문에서 읽을 수가 있다. 이날 로동신문은 대동강하류 쑥섬의 혁명사적지와 통일전선탑 준공을 보도했다. 기사는 「민족의 통일운동사에 길이 빛날 성지」란 제목에 사진 3장을 곁들여 1면의 거의 모두,「쑥섬과 더불어 길이 전해질 민주대단결의 위대한 경륜」이란 제목의 기명기사가 2면 전면을 차지했으니,전체 6면중 3분의 1 꼴이나 된다.
그 보도에 의하면 쑥섬 사적지는 48년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김구ㆍ김규식선생등 남한의 정치지도자들과 김일성이 회동했다는 자리에 원두막등을 복원하고,김일성의 친필을 새긴 통일전선탑을 세운 것이다. 이것 자체는 김일성우상화를 위한 조영물이 하나 더 생긴 것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사진으로 보아서는 12만㎡라는 사적지가 대단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쑥섬 사적에 갖다 붙인 그 「력사」다. 이를 보도한 장문의 기사는 김일성이 김구ㆍ김규식선생등에게 통일전선의 방략을 교시했고,이에 감격한 두분은 눈물까지 흘렸다고 되풀이해서 쓰고 있다. 그 투는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난다.
『위대한 수령님… 에 접한 김구선생은 3ㆍ1운동을 계승한 「법통」으로 여기면서… 오랜 망명생활끝에 귀국한 나날에도 「옥새」맞잡이로 품고 있던 「상해림시정부」의 인장을 경애하는 수령님앞에 내놓으며 「장군님,조선이 정말 주인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을 이끄실 분은 장군님뿐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장군님께 맡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이것은 북에서 두고 두고 써먹은 허황된 이야기의 되풀이다. 이렇게 꾸며진 북한의 영화도 우리 텔레비전을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그러니 이 역시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이 이야기 바로 뒤에 붙은 결론도 읽어둘 필요가 있다.
『쑥섬 협의회는 우리나라 통일운동사에서와 전조선적인 민주주의 통일정부 수립에서 불멸의 력사적 의의를 가지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찌기 제시하신 주체적인 통일전선운동」은 「남조선에서의 망국적 단독선거」를 완전히 파탄시켰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공명정대한 방안」으로 됐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쑥섬이 왜 「성지」인가를 잘 말해준다. 쑥섬 사적을 조작하고 통일전선탑을 세운 시점의 절묘함도 깨닫게 한다. 쑥섬에 얽힌 「력사」는 바로 북한의 법통을 증명하는 건국신화의 한 토막이다.
그 신화에 의하면 평양정권이야말로 한반도 유일의 통일정부요,그러니 「두개의 조선」은 있을 수가 없다. 그 통일정부는 남북을 통틀은 통일전선의 성과로 탄생했고,그 「력사」는 쑥섬 사적 준공 닷새 뒤에 열리는 평양 범민족대회로 이어진다. 남북총리회담도 마찬가지다.
그 통일전선이란 『로동계급의 당의 령도 밑에 일정한 혁명단계에서 해당 혁명의 승리에 리해관계를 같이 하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계급,계층 및 개별적 인사들이 공동의 원쑤를 반대하기 위하여 뭇는 정치적 련합』(앞의 조선말사전)이다. 통일전선탑의 의미가 이것이라면,탑을 세운 다음달의 남북회담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북의 손님들이 귀환하는 영상이,자꾸만 로동신문 사진에서 보았던 통일전선탑의 모양과 겹친다. 언짢기는 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말들을 쑥섬의 「력사」에 견주어 반추하게도 된다.
그런 뒤끝의 결론이 바로 「조심스런 실망」이다. 아예 실망을 않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남은 길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오는 10월까지,그리고 북한의 「력사」가 달라지기를,북한의 채비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며,스스로 대비하는 「슬기」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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