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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위한 설계(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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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위한 설계(사설)

입력
1990.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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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들어 자연은 인간에게 유난스런 시련의 매질을 해왔다.연초부터 햇볕 보기가 어려울 만큼 비가 내리더니 장마도 지긋지긋하게 길었다. 그래서 장마가 끝났을 때 올들어 내린 비는 예년의 두곱꼴이었다고 계산됐다. 밭에서는 채소가 자라지 못해 비에 녹아버리고,논에서도 벼가 시들시들했다.

인간은 새삼 물보다 눈부신 햇볕의 은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기나긴 장마가 끝나자 기록적인 무더위로 도시는 타고,농가는 또다른 재앙에 마음이 탔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햇살은 채마밭을 태우고 과수의 열매를 말라 죽였다. 바닷물이 달아올라 양식장과 어장이 떼죽음의 재앙을 당했다.

도시는 생존을 지탱해주는 수돗물과 전기를 타오르는 사막에 빨려들어가는 물처럼 한없이 삼켜버렸고 전국의 바닷가와 유원지는 인산인해로 돌변했다. 전국이 쓰레기와 바가지와 자동차로 뒤덮인 듯했다.

그러나 자연은 호된 시련을 주는 것처럼 또 반드시 인간에게 안식과 수확을 줄 것이다. 오늘의 말복은 그 유난스럽던 비와 폭염의 시련이 끝나고 새로운 거둠과 안식의 계절이 다가섰음을 암시한다.

유난스런 뙤약볕이 쪼이기 불과 보름사이에 쏟아진 햇살이 벌써 예년의 총량을 넘어섰다고 했다. 예년에 없이 쏟아진 물과 햇살은 또한 벼농사의 풍년을 기약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더위에 지쳤던 사람이나 짐승이나 비로소 아침 저녁으로 제법 싱그러운 가을의 입김을 예감할 수 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우리는 이 여름을 헛되이 보내는 후회가 없도록 스스로 다스려야 될 때임을 깨닫게 된다.

가혹했던 자연의 시련을 넘겼다는 안도보다 새로운 용기와 의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대자연이 준 시련보다 더 심각한 정치와 사회의 기능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눈 깜짝할 33초사이에 26개 안건이 국회를 통과한 뒤 야당없는 국회는 「정치휴업」 상태에 있고,치솟는 물가에 수출부진과 내일을 외면하는 과소비는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

기록적인 더위와 기록적인 바캉스의 굿판에 취해 있는 동안 깜빡 잊었던 우리의 현실은 사실 6공화국 최대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정치는 좋게 말해서 여름방학이요,비관적으로 말해서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 있다.

게다가 중동에서는 지금 사상최대의 힘의 시위가 언제 전쟁으로 폭발할지 모르는 공포의 상황에 있다. 개미처럼 끊임없이 땀을 흘렸어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위기가 코앞에 닥치고서야 우리는 지금 매미처럼 노래만 불렀던 과거 수년을 후회하고 있다.

지금은 누군가 감히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외쳐야 될 때요,힘을 잃어버리면 정치에 새로운 영감과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야 될 순간이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또다시 90년의 남은 시간을 대자연의 시련보다 더 혹독한 시련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자연의 시련은 계절과 함께 사라질 수 있지만,인간 자신이 저지른 재앙은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된다. 다가서는 푸르른 하늘을 꿈꾸면서 이 가을을 설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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