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독총선 앞두고 정치입지 엇갈려/인기 급상승 초대총리 굳혀 콜/선거방식 불리… 참패위기에 겐셔동서독 통합과정을 지켜본 많은 전문가들은 독일통일을 한스ㆍ디트리히ㆍ겐셔 서독 외무장관의 통찰력과 헬무트 콜 총리의 추진력이 어우러져 빚어낸 걸작이라고 평한다.
두 지도자의 역할은 통독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주변강대국은 물론,독일인들 스스로 놀랄만큼 빠른속도로 통독이 이루어지도록 박차를 가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독일통일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지금 두 일등공신의 정치적 입장은 미묘한 명암의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일약 통독의 주역으로 부상한 콜은 지난해까지 바닥을 맴돌던 인기를 단숨에 만회하고 통일독일의 초대총리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통독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던 지난 3월의 동독선거에서 콜의 서독기민당과 제휴한 동독기민당이 예상을 깨고 사민당에 압승을 거둔데다 현 기민당의 인기가 50%이상으로 치솟고 있다.
반면 제3당(자민당)지도자라는 캐스팅보트역을 활용,15년간 집권당의 파트너로서 외무장관자리를 지켜온 겐셔는 통독으로 오히려 정치적입지가 약화될지도 모르는 곤경에 처해있다. 지난 3월 동독선거에서 자매당인 동독자민당이 5.2%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데다 최근 전독선거방식이 겐셔의 자민당엔 다소 불리하고 콜의 기민당엔 유리한 쪽으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서독의 기독사회동맹의나 동독의 독일사회동맹,민주출발당 등이 오는 12월의 동서독통합선거에서 의외로 선전할 경우 자칫 제3당에서 군소정당으로 밀려나 통일독일에서의 내각참여가 봉쇄될 위험마저 있다.
애당초 콜보다는 겐셔가 통독문제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두 지도자의 처지는 현실정치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콜과 겐셔는 성장배경뿐만 아니라 정치스타일에서도 유사한 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평론가들은 바로 이런점때문에 두지도자가 「동색의 라이벌」 관계를 피해 절묘한 협조와 역할분담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통독추진과정에서 겐셔가 치밀한 전략가로 국제외교가를 잠행하며 드러나지 않는 활약을 했다면,콜은 통큰 세일즈맨처럼 독일통일을 거스를수 없는 대세로 기정사실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 겐셔가 제임스ㆍ베이커 미 국무장관이나 예두아르트ㆍ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을 만나 주변강대국들의 통독에 대한 상반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동안 콜은 동독을 방문해 선거지원유세를 하거나 서독내 지지자들과 하루 몇시간씩 대화를 나누는 등 통일이후의 정치기반을 다졌었다.
이런점에서 통독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통독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사실 겐셔였다.
겐셔는 서방지도자 대다수가 고르바초프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볼때 홀로 고르바초프의 평화정착 노력에 신뢰를 표시했다. 나토가 서독배치 랜스미사일을 신형으로 교체하려고 했을때도 겐셔는 미국과 심지어 콜과의 반목을 감수하면서까지 끝까지 이를 반대해 통독에 필요한 긴장완화무드를 조성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지난해 11월 주변 강대국들의 의표를 찌르며 전후 40년간 금기시돼온 통독문제를 가장 먼저 공식거론한 것도 겐셔였다.
콜은 베를린장벽 붕괴전까지는 고르바초프를 나치선전상 괴펠스에 비유하는등 냉전적 사고를 고수하며 통독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었다. 이렇게 보면 콜보다는 겐셔가 통독의 최대영광을 안아야 마땅할듯 하지만 실리는 콜이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따지는데 간과할수 없는 점은 콜이 동서독통일을 실질적으로 가능케한 서독의 물질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사실이다. 콜은 자신의 표현대로 「이데올로기도 거대한 비전도 없는 평범한 정치인」이지만 82년 총리에 취임한후 연평균성장률 2%의 서독경제를 성장률 4%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경제력은 도산직전의 동독경제를 떠맡는데 드는 막대한 통독비용을 감당하고 독일통일에 이의를 제기했던 소련 및 폴란드 등에게 무마용원조를 제공할수있는 바탕이 된게 사실이다.
결국 겐셔가 제시한 통독의 이상과 비전을 탁월한 현실감각과 실전력을 지닌 콜이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통일후 대대적으로 재편될 독일정치 판도에서 겐셔보다는 콜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결과일지도 모른다.
2차대전이 터졌을때 15살이었던 겐셔는 나치군대에 징집돼 방공포대의 레이다병으로 복무했다. 종전후 겐셔의 고향인 할레지방은 동독영토가 됐고,52년 서독으로 탈출함으로써 그는 실향민이 됐다. 이때문에 겐셔는 통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70년대 동서독간 여행규제가 완화된후에는 자주 동독을 방문,친지들과 어울렸다.
반면 2차대전이 끝났을때 15살이었던 콜은 자신의 말대로 전후세대 정치인이다. 그렇기때문에 통독문제를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문제로 인식하고 냉철히 통독후의 집권구상까지 할수 있었던 것으로 볼수있다.
통독에 관한 두사람의 공헌도는 역사가들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겠지만 당장 오는 12월2일로 예정된 동서독 통합선거에서 독일의 유권자들은 통일의 이상과 비전을 제시한 겐셔보다는 실질적인 막판추진력을 발휘한 콜에게 보다 높은 점수를 매기게 될 것 같다.<김현수기자>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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