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교류제의에 “동문서답”/최근엔 금기 군사문제도 수용 남/「미군철수」등 정치조건 내세워 북노태우대통령의 7ㆍ20특별선언은 기존의 우리 입장에서 상당히 앞서나간 전향적 대북제의로 평가되고 있으나 북한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임에 따라 올해 8ㆍ15를 계기로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남북한은 서로 분단이후 꾸준히 각종 제의를 발표해 왔으나 우리측이 주로 인적ㆍ물적 교류와 인도적 측면의 대화를 강조한 반면 북한은 정치ㆍ군사 측면의 대화ㆍ조치 등을 주장함으로써 평행선만을 그었을 뿐 성과를 거둔 적은 거의 없었다. 우리측의 계속된 대화및 교류제의는 그때마다 다양한 조명을 받아왔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북한의 개방을 끈질기게 촉구하고 우리 내부로는 전진적인 통일논의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0년간 국력신장과 함께 부쩍 늘어난 우리의 대북제의중 인적ㆍ물적 교류부분과 이에대한 북한의 대응을 비교해 보면 현재 남북간에 가로놓여 있는 입장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서울의 봄」이라 일컬어지는 80년대초에 들어서면서 남북간에는 총리회담 실무접촉이 열리는등 대화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으나 5ㆍ17이후 북한이 대화를 중단함으로써 84년까지 상호 제의와 주장만이 교환됐을 뿐 일체의 회담이 열리지 못했다.
우리측은 81년 1월12일 당시 전두환대통령이 남북당국 최고책임자간 상호방문을 제의한 데 이어 각종 대북제의를 통해 북한의 닫힌 문을 두드렸으나 전혀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북한은 1ㆍ12제의에 대해 즉각 「두개 조선」논리로 비난하고 나선 뒤 ▲민주인사 석방 ▲반공정책 포기 ▲6ㆍ23선언 취소 ▲주한미군 철수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이어 81년 11월16일 이광표 당시 문교장관은 북한에 「남북 고대유물교환전」을 제의했으며 그 며칠후인 1월22일 전대통령이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천명했다. 북한은 역시 이들 제안을 거부했으며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에 대해선 자신들의 고려연방제를 주장하며 과거와 같은 전제조건을 거론했다.
우리측은 82년 2월 손재식통일원장관의 대북성명을 통해 실현가능한 모든 아이디어를 망라한 20개 시범실천사업을 제의했다. 이 시범실천사업은 지금도 유효하며 다시 검토되고 있는 항목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이중 주요내용으로는 ▲서울평양간 도로연결ㆍ개통 ▲이산가족 우편교류ㆍ상봉 ▲설악산ㆍ금강산 자유관광공동지역 설정 ▲인천진남포항 개방 ▲상대방 정규방송 청취 ▲외국인 판문점통과 자유왕래 ▲공동어로구역 설정 ▲쌍방기자 자유취재 보장 ▲민족사 공동연구 ▲일용생산품 교역및 자연자원 공동개발 ▲비무장지대 공동경기장 마련및 자연생태계 공동조사 ▲군비통제협의및 군사책임자간 직통전화 설치 등이 있다.
사실상 현재 남북회담이나 대북제의를 통해 발표되는 관계개선방안이 이때 모두 정리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제의도 전과 마찬가지로 비난ㆍ거부한 뒤 9일후 남북 정치인 1백인 연합회의 소집을 새로 제안하고 나섰다.
이후 우리측은 계속 적십자회담 재개촉구,IPU 서울총회 북한참가환영,조건없는 남북대화 촉구 등을 계속 발표했으나 북한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버마 아웅산사건을 일으켜 남북관계를 경색시켰다.
84년들어 북한은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제의,4년만에 남북대좌가 이루어졌으나 공산권 불참결정에 맞춰 북한이 불참선언을 함으로써 3차례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 즈음 남북간에 나타난 흥미있는 현상은 북의 수재물자 제공을 둘러싼 상호공방. 남북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진 84년 8월20일 당시 전대통령은 높아진 경제력에 근거,북한에 기술과 물자를 무상공여하겠다고 제의했다. 이에대해 북한은 9월8일,우리측에 수재구호물자를 제공하겠다며 맞받아쳤다. 북한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교류를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나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우리측은 북한의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며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높았으나 대화재개를 위해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정,이 제안을 수락했다. 이를 계기로 남북 경제회담,적십자회담 등이 열리고 다음해인 85년 고향방문단교환까지 이뤄졌으나 북한측은 예상치 못한 우리측의 제의수락으로 쌀 5만섬등 수재물자를 확보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는 후문이다.
이어 열린 경제회담은 5차례나 개최됐으나 우리측이 승용차,컬러텔레비전,피아노 등을 판매하겠다고 밝힌 반면 북한측은 철강재,남해어족,소금,감귤 등을 사겠다고 제안하는등 기본적으로 체제대결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입장을 보임으로써 성과없이 끝났다.
85년의 남북대화 「호황기」를 지나 86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북한이 팀스피리트를 이유로 대화를 중단하고 우리측의 금강산댐 건설중지요구등으로 다시 침체기에 들어갔다.
6공화국들어 우리 내부에서 통일논의가 고조되고 정부의 7ㆍ7선언이 발표됨에 따라 대북제의는 양과 질 모두에서 빠른 진전을 보여왔다. 아직 가시적 성과는 없으나 그동안 금기시 되어온 군사문제까지 논의할 수 있는 고위급회담 개최가 남북간에 합의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상황발전을 반증한다.
앞으로 북한의 입장을 포용적으로 이해하려는 우리측의 입장과 북한의 폐쇄정책 포기가 맞아 떨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끈질긴 대북제의는 남북 관계개선에 가시적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정광철기자>정광철기자>
◇80년대 남북한 주요제의
●남
▲남북한 당국최고책임자 상호방문(81ㆍ1ㆍ21)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82ㆍ1ㆍ22)
▲20개 시범실천사업제의(82ㆍ2ㆍ1)
▲남북 당사자간 직접대화(84ㆍ1ㆍ11)
▲상주연락대표부 설치(85ㆍ1ㆍ9)
▲남북 수자원당국회담(84ㆍ11ㆍ28)
▲민족자존과 통일ㆍ번영 특별선언(88ㆍ7ㆍ7)
●북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80ㆍ10ㆍ10)
▲남북 정치인 100인 연합회의(82ㆍ2ㆍ10)
▲남북 정상ㆍ사회단체 연석회의(83ㆍ1ㆍ18)
▲남북한ㆍ미 3자회담(84ㆍ1ㆍ10)
▲서울올림픽공동주최(85ㆍ7ㆍ30)
▲한반도 비핵ㆍ평화지대 창설(86ㆍ6ㆍ3)
▲포괄적 평화방안(88ㆍ11ㆍ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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