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공산당 입당… 작년 정치국원에 발탁/정치감각 탁월… 고 대리로 보수무마 기대신설된 소공산당 부서기장직에 선출돼 일약 공산당내 공식서열 2위로 부상한 정치국원 블라디미르ㆍ이바시코(58)는 고르바초프 개혁노선을 철저히 추종,「고르바초프의 수하」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이바시코가 보수파의 리더 리가초프를 경선에서 압도적 표차로 제치고 당실무를 관장할 부서기장에 선출된 것은 일견 완강한 듯 보이던 보수세력의 저항이 실상은 개혁의 대세앞에 무력한 것임을 최종적으로 확인케 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고르바초프가 이미 권력중추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공산당을 사실상 완전 평정,자신의 대리인을 통해서도 관리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바시코의 부서기장선출은 이번 당대회의 어떤 행사보다도 소련의 정치개혁,그중에서도 공산당 자체개혁이 고르바초프의 복안대로 진행되고 있고,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바시코자신도 부서기장 출마연설에서 『직책에 관계없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당의 쇄신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동부 하리코프에서 태어난 이바시코는 전통적 공산당관료들과는 달리 고도의 전문가적 식견과 개혁의지를 함께 갖춘,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 세대」의 전형적 이력을 가지고 있다.
56년 하리코프광업대를 졸업한 엔지니어출신인 그는 60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73년까지 경제전문가로 연구와 교육에 종사했다.
73년 그는 고향 하리코프의 지역당 제1서기로 임명되면서 당직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후 70년대말까지의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프가니스탄 카르말정권의 정치고문으로 파견되기도 하는 등 탁월한 정치감각과 식견을 평가받는 것으로 보인다.
이바시코가 처음 중앙무대에 진출한 것은 86년 우크라이나공화국 정치국원겸 서기당시 중앙당 중앙위원후보로 선출되면서다.
이때까지만해도 그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87년 당시 우크라이나공화국 당제1서기이던 보수파의 거두 시체르비츠키에 의해 갑자기 공화국당 서기국에서 탈락하고,이것이 고르바초프서기장과 시체르비츠키간의 알력에 따른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요인물로 부각됐다. 그리고 이어 88년 12월 공화국 당제2서기로 복귀하면서 고르바초프가 그를 시체르비츠키의 후계자로 점찍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바시코는 지난해 9월 시체르비츠키의 퇴진과 함께 러시아공화국에 이어 두번째로 큰 우크라이나공화국의 당제1서기가 됐다.
그리고 지난해 12월에는 후보위원을 거치지 않은채 곧장 중앙당 정치국원으로 발탁돼 권력핵심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또 지난달에는 공화국 최고회의의장으로 당선돼 그가 권력구조 개편속에서도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암시했다.
일부관측통들은 고르바초프가 이바시코를 부서기장으로 천거한 주된 이유는 그가 개혁노선을 지지하면서도 온건성향을 지녀 보수파를 무마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 러시아공화국과 함께 소련의 주축인 우크라이나공화국의 연방에 대한 결속을 유지하기 위한 배려에서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이바시코를 공산당제2인자로 선택했으리란 분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바시코 개인이 탁월한 정치감각과 실무능력,그리고 특히 확고한 개혁실행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평소 『페레스트로이카는 20년전에 시작됐어야 했다』고 강조해 왔다.
소 공산당은 이제 이바시코란 새로운 관리자의 주도하에 고르바초프 개혁노선에 맞게 순치돼 갈 것이다.<모스크바=이장훈특파원>모스크바=이장훈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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