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분출식 지양… 체제 잠재력 확충을서독의 저명한 정치평론가 테오ㆍ조머는 이제 목전에 박두한 독일의 통일을 가리켜 「기대하지 않았던 역사의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기에 그는 통일독일을 아예 「꾸어보지도 못했던 꿈」의 실현이라고 극화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독일통일은 과연 우리가 인류역사속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신의 작태인가. 아니면 역시 인간의 피땀어린 프로메데우스적 노력의 결실인가. 물론 거기에는 단시간에 동서독 안팎에서 회오리처럼 밀어닥친 일련의 사건들,예컨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동구 사회주의체제의 연이은 붕괴 그리고 동독에서 분출된 뜨거운 민주화의 의지와 통일의 열망 등이 있었고,이들 상황변수들이 조합되어 교묘하게 일구어낸 역사적 경이 내지 신비의 그림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서독 통일의 과정을 보다 면밀히,그리고 본질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역시 숭고한 인간정신과 끈질긴 인간적 노력의 승리임을 간과할 수 없다. 독일통일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역사를 긴 안목으로 내다보고 착실히 준비하는 자에게 역사의 신은 결코 무심하지 않다는 교훈을 다시 배운다. 여기서 우리는 자못 섬뜻한 심경으로 자문하게 된다. 「혹시 독일민족이 포착한 그 절호의 기회가 오늘,아니면 내일 우리 옆을 그냥 스쳐가는 것이 아닐까」
동서독의 통일과정은 양독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이기는 하나 실제에 있어 항상 서독이 그 주도권을 잡아 왔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독의 통일준비과정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그 과정속에서 부각된 몇가지 단면을 우리의 경우와 비교하여 봄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 보고자 한다.
우선 서독의 통일접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측면은 이성이 감성을 크게 앞질렀다는 점이다. 그들은 명분에 사로잡혀 통일을 소리쳐 외치고 일거에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급진적 방안을 모색하기 보다는,정서의 분출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실현가능한 합리적방안을 시의에 맞게 안출하고 또 그것을 성사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이들은 막바로 통일을 향해 매진하기 보다는 양독간의 대결구조를 평화구조로 옮겨놓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들은 아예 통일이라는 주제를 정치적 의제로 다루기를 크게 꺼렸고 오히려 「독일문제」라는 가치중립적 개념으로 표현하기를 선호하였다.
조야가 눈만뜨면 피맺히도록 통일을 외쳐온 우리네는 아직도 분단이라는 역사의 벼랑에 매달려 역한 삶을 사는데, 이 땅의 교조주의자들에 의해 「분단고착화」의 전형으로 매도되던 이른바 동서독모형이 바로 통일독일의 값진 요람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역사의 아이러니에 속한다.
멀리 내다보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독일인의 이성은 역사의 길목에서 우회하는 길이 가장 빠른 길임을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 통일논의에 있어 민족정서의 분출이 너무 과하다. 오천년 역사의 하중때문일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주변에 있는 그많은 통일지상주의자들이 그들의 구체적 삶속에서 얼마나 민족의 화해나 통일에 기여하느냐는 의문이다. 체제지배나 체제전복을 위해 통일을 크게 외치는 이들에게 있어 통일의 구호는 한낱 허위의식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통일논의와 연관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이성의 복원과 이를 통한 정치적 합의기반의 확충이다.
두번째로 독일의 통일준비과정에서 크게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동서독간의 통일을 위한 하부구조를 꾸준히 다져왔다는 점이다. 분단이후 수십년동안 양독간의 다양한 인적ㆍ물적 교류를 여기서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과정속에서 서독은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분단의 아픔을 줄이고 동서독간의 동질적 하부구조를 창출하는데 도움이 되는 조치라면 무엇이나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의할만 하다. 말하자면 통일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앞서 동질적 생활문화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그가 서독에 의해 준비된 이러한 줄기찬 통일준비작업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1일 독일의 사회ㆍ경제통합 이후 동독 곳곳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혼란은 상이한 체제를 하나로 접목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역사적 작업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경우 여지껏 남북한간의 말의 성잔만 요란했지,통일을 위한 하부구조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무엇하나 이루어진게 없다. 이산가족간의 생사확인,편지왕래조차 되지않은 상황이 남북한 관계의 현주소이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이라는 우리가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가 개재한다고는 하지만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세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서독의 체제관리의 측면이다. 서독은 동서독간의 기본조약에 의해 평화구조를 정착시킨후 독일통일의 과제를 먼 훗날로 미루고 그냥 안일하게 체제관리에 임해온 것이 아니었다. 서독은 자신의 체제를 인류의 꿈을 가장 잘 실현시키는 이상적 체제로 만들기 위해 그간 경이적인 노력을 경주해 왔다.
전후의 폐허로부터 세계 최상의 자유ㆍ평등ㆍ복지를 구가하는 일등국가로 부상한 독일은 산업민주주의 맥락에서 볼 때,이미 미국식 자본주의의 구조적 결함을 크게 극복함으로써 참신한 체제모형을 선보였다. 서독은 언젠가 도래할 통일독일사회의 원형을 지향하며 일찍부터 체제의 민주화ㆍ인간화ㆍ복지화에 온갖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그때문에 공산주의체제의 수호에만 관심을 모았던 동독은 한번도 서독에 대한 대안적 체제모형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통일은 서독체제의 성공의 결실이자 동독체제의 실패의 산물인 것이다.
체제관리라는 면에서 우리의 경우는 서독과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역대 권위주의정권은 남북한간의 상황을 극복하기는 커녕 이를 체제유지를 위해 활용하고 또 그 틀속에 안주하지 않았던가.
이상의 논의에서 서독의 통일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절호의 역사적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축적된 체제능력의 성과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통일이라는 정조에 취하기 보다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체제잠재력을 확충하는데 보다 큰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성공은 언제나 준비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