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밑천 고층건물 급수설비 제작/고향이름 본뜬 「창녕공장」첫해 1억 순익/맨손입지… 동포사회 “신화적 인물”11억 인구의 중국대륙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가로 꼽히고 있는 조선족 2세 석산린씨(46)가 모국을 돌아보기위해 10일 하오 일행 3명과 함께 김포에 도착했다.
석씨는 공산권인 중국에서 아이디어 하나로만 기업을 일으킨지 불과 5년도 못돼 중국대륙 제1의 사영기업가로 등장,한민족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한 사람이다.
더구나 석씨의 이같은 성공은 10년간의 옥살이를 딛고 일어선것이어서 더욱 값진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때문에 석씨는 중국의 우리동포들 사이에서 3살 먹은 아이들까지도 다아는 신화적 인물이 되었으며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돼온지 오래이다.
석씨는 중국 하얼빈근교의 신성조선족촌에 있는 창녕급수설비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부모의 고향인 경남창녕에서 이름을 따온 창녕급수설비공장은 옥상의 물탱크없이도 고층건물에 물을 보낼 수 있는 설비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본사의 생산직종업원 1천명과 중국전역에 판매원 5백명등 1천5백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창녕설비공장은 창립 첫해인 지난 85년 한해에만도 70만원(한화 1억4천만원)의 순수입을 올렸으며 5년이 지난지금에는 매년 우리돈으로 수백억원의 순수입을 기록하는 「거대기업」이다.
또 중국에서만 소화했던 창녕공장의 제품이 몇해전 남극의 중국기지에 설치돼 진가를 얻은 것을 계기로 지금은 미국 파키스탄 탄자니아등으로 수출되고 있다.
오는 가을에 열릴 북경아시안게임 선수촌의 급수에도 석씨의 제품이 이용됨은 물론이다.
석씨가 「전자동기압급수설비」라고 불리는 자신의 제품을 만들게 된 것은 지난 84년.
당시 공무로 출장을 갔던 석씨는 그도시의 고급호텔에 투숙했으나 수압이 낮아 물이 나오지 않자 고층건물의 물 문제를 해결하는 특수설비를 제작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직장이던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연구에 몰두한지 불과 25일만에 자동수압 급수설비설계도를 작성해냈다.
설계도가 마련되자 석씨는 즉시 40여만원(한화 8천만원)의 자금을 빌려 공장을 설립했다. 85년 6월이었다.
석씨가 돈을 빌려 공장을 세우려하자 주위에서는 『지나친 모험』이라며 만류했으나 석씨는 제품생산 3개월만에 빚을 모두 갚아버렸다.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보기힘든 「맨손의 창업」을 석씨는 불과 몇달만에 해낸 것이다.
석씨의 이같은 성공은 물론 하얼빈공대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한 그의 경력과도 무관하지않다. 학교에서 배운 물리학이론이 수압을 이용한 급수설비제작의 바탕이된 것이다.
그러나 석씨를 아는 사람들은 이보다는 석씨의 불굴의 의지가 성공의 모태일 것으로 보고 있다.
석씨는 64년 하얼빈공대를 졸업한지 얼마안돼 당시의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말려 13년형을 선고받고 10년만인 지난 79년 출소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내야했던 석씨는 좌절하는 대신 언제인가는 쓰일 것이라는 희망아래 평소 관심이 있었던 기계제조와 유체학을 독학해왔다. 10년을 복역하면서도 한번도 좌절하지않고 자기연마에 힘썼던 것이 결국 오늘날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장 이름을 창녕이라고 붙일만큼 석씨의 모국애와 동포사랑역시 남다르다.
공장의 근로자를 거의 모두 조선족으로 채용한 석씨는 앞으로 창녕조선족대학과 창녕조선족마을을 설립하고 창녕예술단을 발족시켜 세계무대에 세울 구상까지 갖고 있다.
석씨종친회회장 석준규의원(민자당)의 초청으로 난생처음 모국을 찾아온 석씨는 부모의 고향인 창녕을 둘러본후 삼성전자,삼성석유화학,코오롱건설,금성사,한국화약등 국내업계 관계자들과 만나 상담도 나눌 계획이다.<정숭호기자>정숭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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