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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주의가 통독 “원동력”/김희일(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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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주의가 통독 “원동력”/김희일(특별기고)

입력
1990.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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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까지 영ㆍ불의 패권에 눌려독일의 재통일은 역사의 굴곡속에서 도전과 성공,그리고 좌절을 반복해 온 게르만민족의 민족사에 또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재통일은 과거의 좌절들을 한꺼번에 만회,치유하는 게르만민족의 도약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독일재통일의 의미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음미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시대의 유럽으로 거슬러가 볼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민족의 자존심을 고양시켰다. 반면에 인접한 독일민족에게는 엄청난 고난과 좌절을 안겨주었었다. 민족국가로 발돋움하던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적 팽창주의로 인해 국가로서의 발전자체가 저지당했었다. 특히 프랑스 영국의 아프리카 중동지역의 식민지독점은 식민지경략이 국가발전의 관건이던 19세기에 독일의 왜소함을 조장,민족적 열등감을 심었고,이에 따라 독일인들은 영국 프랑스에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이 1차세계대전을 도발한 것도 민족자체의 호전성때문이 아니라 국가발전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독점상황을 깨뜨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볼수도 있다.

나폴레옹시대를 전후한 유럽사를 다시 한번 분석ㆍ정리해서 본다면 나폴레옹의 출현은 그야말로 유럽사회에 있어서 변화의 방향이 지성과 도덕적 진화보다는 패권과 정복의 측면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나폴레옹의 대두는 유럽의 프랑스화를 가져왔다. 반대로 그 당시 도덕적ㆍ지적 발전단계에 있었던 독일로서는 거의 결정적 치명상을 입게 된 시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속에서 독일은 특히 1차세계대전의 패망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었다.

1929년 세계적인 경제공황,특히 극한에 이른 독일의 경제공황은 1931년 후버 대통령이 독일의 전쟁배상금 지불을 1년 연기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불능의 상태에 빠져 독일인들은 독일을 구제할 메시아적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국적 나치즘을 표방한 히틀러는 범게르만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독일인들의 심정속으로 깊게 접근해 들어갔던 것이다. 히틀러는 모리스의 인종주의,포수의 사회공상주의와 아울러 드루몽의 반유태주의,소렐의 폭력주의를 여러차원에서 응용,범게르만 민족주의를 정립시켰다.

특히 1807∼1808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외쳐댄 피히테의 독일 민족주의의 최초의 선언을 기반으로 하여 범게르만 민족주의를 제창,독일 국민들의 열정적 동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총체적으로 볼때에 나치즘은 분명 게르만사 및 유럽사에 큰 계기를 주었고,인류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경제적손실을 남겼다. 특히 유태인 학살은 상식을 넘어선 극도의 비정상행위로서 히틀러 개인의 유태인에 대한 극도의 배척감이 대량학살이라는 인류사상 가장 큰 죄악을 남겼고 그 책임은 결국 모든 독일국민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2차대전까지의 영ㆍ불ㆍ독간의 삼각관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비해 보다 계산적이고 팽창적인 지배논리를 구사해 왔고 패권주의를 펼쳤다. 반면 독일은 게르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국가주의 및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철학적 사고를 지녔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독일은 엄연히 논리적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사상의 테두리안에 있으면서도 근세까지 프랑스 영국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다. 반면 정신적 영역의 건전함,검소함 등 윤리의식 차원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수준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가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을 겪듯이,독일 역시 서구의 「힘의 사회」속에서 정신영역의 윤리성이라는 문제로 끊임없는 갈등을 안고 나아가는 대표적 국가였다.

유럽사회에서의 게르만족은 로마시대에는 야만족으로서 현재의 서북부 프랑스에 위치한 유목집단이었다. 게르만족은 로마시대에 노예라는 생산수단용으로 활용되면서 프랑스의 원족인 골족과 아울러 고용부족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게르만족은 로마사회를 멸망시켰던 부족중의 하나였으나 결국 다시 프랑크족 지배하에 농민부락을 구성,낙후상태에 머물렀던 것이다.

게르만족은 18∼19세기에는 프랑스 지배하에 있던 마세(masse)족과 독일 후페(Hufe)지역에서 제일 먼저 촌락공동체에서 민주평등사상을 내세워 농민들의 주거지,공동경지등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평등원칙을 세울 수 있었다.

그후 독일은 1884∼188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티즘(진보 팽창주의)을 원용하기 시작했고 비스마르크의 봉건체제 해체작업을 통해 독일식사회민주국가를 세웠던 것이다.

독일은 프랑스ㆍ영국과의 관계안에서 끊임없이 민중ㆍ경제체제의 발전을 모색했으며 융커계급의 개혁은 독일의 근본 발전에 모태가 됐다. 게르만민족은 보헤미안적 방황속에서 독일의 국가주의를 표방하고 나선 도전적 기질을 가진 민족인 것이다. 결국 유럽사회에서는 게르만민족의 도전적이고 저돌적인 민족성을 두려워하며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게르만민족주의는 독일국민을 단결시키는 구심력이자 발전의 활력소가 되는 본질이다.

독일의 완전한 재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독일인들의 잠재의식구조에는 「게르만공동체」라는 심리적ㆍ내적 공감대가 자리잡고 있고 이것이 통독의 과정을 급속히 진전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파리 8대학교수ㆍ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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