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정오,소련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묘 입구에는 여느때 처럼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방부처리로 영구보존된 소련 건국의 아버지 레닌의 시신을 보기 위해 소련 각지와 세계각국에서 온 참배객과 관광객들이 새벽 6시부터 입장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차례를 기다리다 지친 참배객들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레닌 얘기가 화제로 올랐다.
한 참배객이 『레닌과 스탈린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레닌의 이념은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큰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그 옆사람도 이 말에 동조하면서 『스탈린식 독재가 소련을 망쳤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은 『레닌의 이념은 이제 페레스트로이카로 빛이 바랬다. 레닌의 시신은 더이상 일반에 공개하지 말고 매장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 옆의 사람은 이 말을 받아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한 지 5년이나 지났는데 국민들 생활이 향상된 게 무엇이 있느냐』고 현 정부를 비판하며 옐친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말에도 『옐친은 정치지도자라기보다 선전가이며 고르바초프야말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정책으로 옮기는 정치인』이라는 반박이 뒤따랐다.
마르크스와 더불어 공산주의 이념의 기초를 다진 레닌의 묘앞에서 벌어진 이 논전은 공산주의의 장래를 결정할 오는 7월2일의 역사적 공산당대회를 앞둔 소련의 정치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줄이 점점 줄어들어 지하 2층에 마련된 레닌의 시신이 안치된 곳을 지나게 됐다.
한때 떠들썩하던 참배객들은 경비병의 안내에 따라 조용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레닌에게 경의를 표하며 시신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시신은 창백한 얼굴에 두 손을 가지런히 배위에 올려놓은 모습이었다.
그순간 정적을 깨듯 한 참배객이 『레닌이 사망했을 때 그의 부인도 시신을 방부처리해 영원히 보존하는 것을 반대했다는데 죽은 사람은 땅속에 묻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말에 응수를 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참배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레닌이 창당한 소련공산당은 일주일뒤 전당대회서 「환골탈태」될 운명을 맞고 있다.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는 레닌의 시신은 이제 마침내 땅속으로 들어가야 할 운명에 처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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