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부,준독립 선언… 불화해소 노력 수포로캐나다가 연방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최대의 「헌정위기」를 맞고 있다.
캐나다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10개주중 뉴펀들랜드와 매니토바주의회는 프랑스계가 80%를 점유하고 있는 퀘벡주에 「특별지위」를 부여하자는 미치레이크협정을 인준만료시한인 23일까지 인준하지 않음으로써 이 협정을 폐기시켰다.
미치레이크협정은 퀘벡주의 독자성을 인정,프랑스언어와 고유문화의 육성보존권을 부여하자는 내용으로 라이언ㆍ멀로니 현총리의 주도로 지난 87년 10개주 정부간에 체결됐었다.
따라서 미치레이크협정의 폐기는 퀘벡주의 「최소한」의 요구와 영국계가 다수인 다른 9개주의 「최대한」의 양보를 조화시켜 퀘벡주를 82년 제정된 캐나다최초의 연방헌법틀안에 끌어들이고자 했던 멀로니총리정부의 정치적패배를 의미한다.
82년 헌법은 영국과의 법적종속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제정됐으나 퀘벡주는 프랑스계 주민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명을 거부해왔다.
그러나 시야를 좀 더 넓혀본다면 이 협정의 폐기는 69년 프랑스어를 연방정부의 공용어로 채택한 이후 영불계 주민간의 「2백년 불화」를 해소시키기 위해 그동안 꾸준히 지속되었던 온갖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음을 뜻하는 보다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역사적의미는 멀로니총리와 로베르ㆍ부라사 퀘벡주총리의 발언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멀로니총리는 미치레이크 협정폐기가 확정된 24일 전국TV연설을 통해 『이날은 캐나다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이라 말하고 자신은 퀘벡주를 캐나다 국가연방의 흔쾌한 동반자로 만들 아무런 새 전략을 갖고 있지 않다고 고백했다. 부라사 퀘벡주총리도 『나는 가장 온건한 요구를 통해 역사적인 일대 모험을 시도해왔으나 실패했다』고 토로하고 앞으로 이민 및 통신부문에서 연방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퀘벡주가 일종의 준독립을 지향할 것임을 밝혔다.
3년전 70시간의 마라톤회담끝에 미치레이크협정이 체결됐을 때만해도 이 협정은 퀘벡주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오히려 영국계 주민들의 반퀘벡 감정을 자극했으며 퀘벡주에서는 거꾸로 독립지향의 야당압력으로 「성급한」조치를 내놓음으로써 결국 오늘의 파국을 초래한 것이다.
즉 협정체결 이후 3개주에서 협정을 체결한 정부가 영국계의 반발로 교체됐고 반대로 퀘벡주는 상점간판을 프랑스어로만 쓰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이미 일고 있던 반퀘벡움직임에 기름을 끼얹었다. 또한 최근에는 온타리오주 브로크빌의 주민들이 퀘벡주주기를 짓밟는 장면이 TV로 방영돼 프랑스계 주민들을 격분시켰다.
이러한 악재의 연속으로 5월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사실상 「분리독립」을 의미하는 주권연합안에 퀘벡주 주민들은 60%의 지지를 보냈다. 지난 1월초만해도 주권 연합안에 대한 지지는 48%에 그쳤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퀘벡주가 당장 독립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독립된」국가체제를 완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구 6백50만으로 캐나다 전인구의 26%를 차지하는 퀘벡주는 경제총생산량이 1천3백억달러로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의 국민총생산을 앞지르고 있다.
또한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국민투표에서 분리독립을 거부했던 80년과는 달리 퀘벡주의 경제계에 프랑스계 주민이 다수 진출하게 된 것도 분리독립움직임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 일으킨다.
퀘벡주는 15세기 프랑스인의 이민으로 형성된 프랑스 식민지였으나 1759년 영국군의 퀘벡시 점령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867년 캐나다에 편입된 역사를 갖고 있다. 69년이후 프랑스계 주민에 대한 완화조치가 새로운 연방체제를 이룩하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오히려 해체위기로 몰고가고 있는 것은 영국계 주민이 퀘벡주의 독자성을 인정하는데 인색했던 때문으로 보인다.<유동희기자>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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