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어떻게 미군을 이겼나/2백30만 참전… 방어군 3∼10배/2중3중 그물 야간 포위공격/미선 정보분석 혼선… 서로 갈등노출/후퇴길도 겹겹이… 악전고투 큰 희생한국전쟁 3년1개월의 진행중 가장 풀리려하지 않은 수수께끼의 하나가 중공군개입이었다.
국가를 세운지 1년도 채 안된 이 가난한 농업국가가 왜 한국전에 그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려 했으며,참전결정은 정확히 언제이고 실제 압록강 도강은 언제했는가,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2차대전의 전승국 미국을 이길 수 있었느냐 하는 것 등이었다.
중공은 지금까지 그 자료를 내놓지 않았었다.
이제 겨우 약간의 정치자료들을 공개하고 있는 중이며 지난 14일 서울힐튼호텔에서 있었던 「한국전쟁연구회」주최 「6ㆍ25 40주년기념 세미나」에서 밝힌 적지해(6ㆍ25당시 평양주재 중공대사관설치 선발대장으로 그후 모택동김일성의 주요연락업무를 맡았다)의 『중국의 한국전참전 결정에 대한 재고찰』은 때문에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6ㆍ25진행중 미 백악관,국무성,국방성,합동참모본부,맥아더사령부 등은 중공의 한국전 참전을 놓고 서로의 정보를 의심하면서 갈등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중공군참여로 미군이 형편없는 실패를 하자 각부처끼리는 『당신네들의 정보가 잘못돼서 그렇다』 『정보분석이 엉터리였다』는 불평을 털어놓기도 했었다.
하여튼 뒤죽박죽이었다.
1964년에 출간된 맥아더회고록에도 중공군사령관이 팽덕회아닌 임표라고 돼 있다. 중공군개입수도 최고 86만이다. 맥아더를 이은 리지웨이,클라크 등의 70년대에 출간된 회고록 「한국전쟁」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등에도 중공군 병력숫자가 최고 40만을 넘어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2백30만이었다. 전중공병력의 66%였다.
이들은 제1차로 10월19일부터 완전무장한 보병 4개군단(12개사단) 3개포병사단 등 15개 사단이 넘어와 1차작전을 벌였다. 북진하는 유엔군 한국군의 당시 총병력은 14개 사단 2개 여단이었는데 압록강두만강 주위에 이미 조직갖춘 인민군병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외줄로 길게 진군하고 있어 중공군의 이 엄청난 병력은 UN군 1개대대당 1개사단을 투입할 만한 병력이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말처럼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미국과 중공의 새 전쟁이었다.
10월26일. 국군제6사단 7연대1대대1중대장 이대용대위는 중대병력 1백50명을 끌고 평북 초산방면의 압록강에 진출했다. 그에게는 한반도가 완전히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6월25일 아침 강원도 춘천시립도서관에 앙드레ㆍ말로의 「프랑스전선」이라는 소설을 빌리러가던중 연락병으로부터 거의 납치당하듯한 채 부대로 돌아와 소양강전투를 하기 시작해 6발의 총탄세례와 10m이내로 치면 아마도 수백발의 총탄 포탄파편의 공격을 받으면서 낙동강전선을 돌아 드디어 압록강까지 섰던 것이다. 수많은 부하를 잃었다.
그는 압록강경비책임을 맡아 멀리서 장강 저쪽으로부터 닭우는 소리를 들으며 국경의 밤을 지냈다.
그러나 28일 대대본부로부터 급히 후퇴명령이 내렸다. 「똥뙤놈들」(중공군)이 쳐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진심으로 존경해마지 않았던 대대장 김용배중령(전사)에게 『무슨 소리입니까. 혼자서라도 이곳을 지키겠습니다』라며 버티다가 결국 후퇴길에 올랐던 것인데 초산운산영변개천을 거쳐 덕천의 국군 제2군단사령부에 11월19일 도착할 때까지 본 것은 오직 겹겹이 둘러싸인 중공군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대원 20명을 마지막까지 끌고 사령부에 보고했다. 소속 7연대중 그래도 부대라는 명칭을 붙여 3백리 포위길을 뚫은 장교는 이대위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중공군이 압록강 국경을 넘을 당시 국군 유엔군의 포진은 서쪽이 워커장군의 미8군 담당으로 맨외쪽으로부터 영27여단 미1기병사단 한국군1사단순이었다. 낭림산맥 왼쪽기슭으로부터 한국군제2군단소속 8ㆍ7ㆍ6사단이 배치됐었다.
동쪽은 아몬드소장이 이끄는 맥아더사령부직속의 미10군단으로 미해병1사단이 장진호를 끼고 혜산을 바라보며 북진중이었고 그 우측으로 미7사단 국군제1군단 예하 3사단과 수도사단이 있었다.
중공군의 기본전술은 야간포위공격이었다. 낮은 항공정찰,항공기폭격때문에 일체 행동하지 않은채 은신처에서 잠을 자고 저녁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하루에 40㎞씩 전진한 후 주력을 상대방 정면에 일단 대기시킨 후 조공부대를 우회시켜 문어발식으로 2중 3중 그물을 쳐 놓은 것이다.
주공세력은 처음 소규모 공격을 해 적을 방심케한 후 야간에 휴대용박격포,수류탄,그리고 전방포병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정면과 배면을 들이친다.
이 공격에서 일부는 빠져나가게되는데 이 빠져나간 병력은 진지후방에 쳐 있는 포위망에 걸리고 또 걸려 죽거나 포로가 된다.
방어군의 3∼4배,어떨때는 10배까지의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이 전술에 먼저 한국군 6ㆍ7ㆍ8사단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오른쪽 날개가 무너지자 왼쪽의 미1사단,한국군1사단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리비호리간 협로를 후퇴군이 지나갈 때 양쪽 산위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은 「인디언 채찍」처럼 한없이 두들겼다. 수백대의 차량,대포들이 파괴되고 무수한 병력이 죽거나 포로됐다.
미8군은 제2차공세인 청천강전투까지를 합해 8천여명의 전사자를 냈다. 1개대대가 고스란히 포로된 일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초라한 무기로 세계최강의 서방군 미군을 처음으로 패배시킨 제1차 디엔비엔푸라고도 할 수 있었다.
동부전선은 가장 깊숙이 북쪽으로 들어와 있었고 미10군 세력을 대표하고 있는 미 해병제1사단에 중공군 주력의 포위작전이 시작됐다. 유명한 장진호 후퇴작전이다.
미 해병사단 5ㆍ7연대는 마침 영하30도(섭씨)의 얼어붙은 장진호를 통과하고 있었는데 11월30일 서부전선의 붕괴와 함께 후퇴명령을 받고 중공군 12개사단의 포위망을 뚫지 않으면 안됐었다. 전진부대에서 1백20㎞쯤 떨어진 진흥리 사단본부에 라이프지,더타임스지,헤럴드트리뷴지 등의 세계굴지언론기관의 기자들이 종군해 있었기 때문에 미 해병1사단이 12개 중공정예사단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한 용맹은 당시 전세계에 널리 알려졌었다.
미 해병들은 서쪽의 8군처럼 자동차를 탄 채 도로로 후퇴하는 대신 도로의 자동차는 부상병 보급품만 실은채 병력은 도로양옆의 험한 봉우리를 차례차례 건너 뛰어넘으며 후퇴해 계곡의 서멸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산을 타는일,밤에 걷는 일을 어찌 중국이만이 해낼 수 있단 말인가』라는 반문과 함께 이들은 곧바로 중공군과 산악전투를 벌이면서 낮에는 항공기가 지원해주는 가운데 후퇴해 빛나는 해병의 공훈을 세웠다.
중공군개입은 한반도 통일의 꿈을 일보전에 무너뜨린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패배할 줄모르는 전쟁영웅 맥아더에게도 영원한 패배를 안겨준 격이 됐다.
맥아더는 중공군개입이 본겨화되던 11월24일 청천강으로 날아와 전황을 청취하고 전용기로 직접 압록강연안을 따라 한만국경을 시찰했다.
만주성역이 있는한 승리는 어렵다는 것을 판단했다. 그는 적어도 압록강다리를 부술 수 있도록 미군기가 국경을 넘게 해달라고 워싱턴에 간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절됐다. 맥아더의 말처럼 미국은 이미 전쟁을 이길 결심이나 한반도를 통일시킬 욕구를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과 유엔은 적편인가 아군편인가』를 물으면서 사표를 썼다. 그의 사표서는 참모들의 항의로 곧 찢어졌지만 그가 전쟁을 이길 기회는 백악관이 영영 주지않았던 것이다.<정일화 북한부장>정일화>
◎중공군 참전문제 쟁점 대담/“소련군 지원취소로 도강 연기/미38선 돌파ㆍ대만등 관련 개입”
중공군참전에 대한 의문은 89년이후 상당한 중공측 극비자료가 나오고 있는데도 아직 확연히 풀리고 있지 않다. 6ㆍ25의 중공군 참전문제를 연구해 온 홍성태씨(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ㆍ예비역준장ㆍ사진우)와 박두복교수(외교안보연구원교수ㆍ정치학박사ㆍ사진좌)와의 대담을 통해 그 쟁점을 추적한다.
①참전결정 시기
▲홍=적지해는 이번 논문발표를 통해 10월2일 당정치국회의에서 처음 결정했고 10월8일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정식 항미원조군을 발족했다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10월2일 정치국회의 벽두에 모택동이 『이 회의는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파병시기와 사령관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고 이어 동북지구 정치국주석 고강은 『사령관은 임표로 이미 결정하지 않았는가』라는 이의를 제기한 대목이 최근 공표된 중공당사에 나오고 있다.
7월7일의 중앙군사위에서 결정된 흔적이 있다.
▲박=공식결정을 위한 준비는 김일성이 남침계획을 통보한 50년 4월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결정은 2일로 보는 것이 옮으며 15일 도강하려 했다가 스탈린의 공군지원이 안되는 바람에 연기된 후 19일부터 실제로 압록강을 건너게 된 것으로 본다.
②소련과의 협조문제
▲박=적어도 전쟁발발 과정에서는 소련의 어떤 도움요청이나,중공의 지원요청같은 것은 없었고 중공이 10월2일 파병 결정이후 주은래를 통해 소련공군과 중장비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거부하다가 소련지원 없이도 파병하겠다는 결정을 듣고 공군등을 지원하게 됐다.
▲홍=이 문제도 좀 더 연구해 봐야한다. 당시 중공에는 3만여명의 소련고문관들이 군에 배치돼 있었고 10월2일 파병결정후 주은래가 스탈린을 만나러 간 것도 공군지원을 요청하러 간 것이 아니라 이를 독촉하러 간 것이다. 9월 하순에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소련미그기가 한국전참전을 대비해 이미 날아와 있었다.
③중공군개입 동기
▲박=첫째는 중국의 안전이다. 38도선쯤에 그들의 적 미군을 묶어두고 한반도 북쪽을 완충지대로 삼아야지 만일 미군이 압록강까지 올라오면 중공은 방어선이 길어지고,생명선인 만주지역의 안전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에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미군을 38선까지만 쫓으면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개입을 통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는 일,국내정치문제를 정리하는 일 등 복합적이 요인이 있다.
▲홍=모택동은 미국의 대만지원으로 미와 언젠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중공이 미국보다 유리한 지리적,지형적 여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 하여금 중공군을 더욱 얕보게 하고 이를 이용해 월등한 수적 압도로 야간기습공격을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도 하고 있었다. 싸워야할 필요성과 승리할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개입한 것이다.
모는 팽덕회에게 누누이 「산악전을 하라」 「야간기습전을 하라」 「절대로 약한 곳을 골라 이길 수 있을 때만 공격하라」 등의 구체적 지시를 내리고 있다.
⑤개입에 따른 예상위험도
▲박=팽덕회연설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해방전쟁을 2∼3년 더하는셈 치자고 했다. 정권수립후의 경제부흥,전후복구사업을 완전히 담보로 한국전에 왔다.
▲홍=모는 파병결정때 일주일간이나 잠을 못잤다고 했다. 당시 대만등 국내저항세력은 잔존했고 미국은 핵무기등 엄청난 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체제붕괴까지도 각오했을 것이다. 참전이후 중국본토의 여러 해안지대에 미군상륙작전,공습을 대비한 방어호 구축까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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