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력을 쓰지않는 냉전의 역사는 결국 군비강화와 군비축소의 두 초점을 시게추처럼 오가는 사이에 반세기를 보냈다. 지금 세계가 냉전을 청산하는 역사적 전환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협정에 동서가 합의한뒤 전략핵 30%감축과 재래식 군비축소협상에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만일 한반도에도 냉전 청산이라는 세계적 흐름이 불가피하게 현실화한다면 결국 군비축소문제가 표면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미 미국은 주한미군의 3단계 감축안을 밝힌 바 있다. 이어서 정부는 남북한의 군비축소문제를 다룰 「군비통제 조정위원회」를 설치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군축을 다룰 상설기구를 두기로한 것은 앞으로 남북관계에서 군축문제가 구체적인 의제로 등장하리라는 예상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북한측은 통일방안에서 「무조건 통일」을 전제로 주장한 것처럼,군축에서도 무조건 먼저 군비축소부터 하자는 주장을 되풀이 해왔다.
이에비해 지난달 31일 내놓은 군축안은 「남북간 신뢰조성」 조치를 포함하고,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에도 시한을 두지 않고 있는 점등이 주목되고 있다.
이밖에도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나,고위군사 당국자간의 직통전화설치,남북 군사공동위원회 구성 등 우리측 제안과 접근한 내용이 주목되고 있다.
북한이 새로운 군축안을 내놓은 것은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 발표와 때를 같이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북측에 충격적인 한소 정상회담에 찬 물을 끼얹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어쨌든 한반도정세도 냉전청산이라는 대세를 언제까지 일방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일이라면,군축문제는 어차피 이미 등장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정부가 전담기구를 두기로 한것도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자칫 샌프란시스코회담 이후 팽배한 북방외교 열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직적이고 현실적인 인식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유럽에서의 군축협상과정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군비축소는 그 무엇보다도 상호신뢰가 선행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 남북한 군축문제가 쉽게 어떤 결실을 가져올 만큼 여건이 성숙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북한은 먼저 「적화통일」 노선을 포기하고,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순전히 기술적인 군축협상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유럽에서 동서합의의 가능성이 열리기 까지에는 「현장검증」의 문제나,군사정보의 상호교환과 군사훈련의 상호참관 같은 신뢰성구축 작업이 선행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둬야 한다.
막대한 군비부담이 경제에 심각한 주름살을 지게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군비축소를 한시 바삐 실현해야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군사체제가 동시에 정치체제화돼 있는 만큼 과연 긴장완화와 군축을 감당할 생각이 있는 가도 문제다. 북측이 실뢰성구축보다는 군축에 비중을 두는 것은 따라서 신속없는 「정치적 구호」라는 우리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다.
군축이라는 최종적 목적을 위해서도 이런 선행요건을 강조해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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