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균세」와 현「북방」엔 국력차이”/힘없는 세력균형 종속 초래/“청ㆍ일견제”친로로 침탈 가속/소,대한국 영향력확대 「남하정책」맥락 경계 필요지난 5일의 한소정상회담이 상징하는 한국외교의 다변화와 한반도주변정세의 재편 움직임은 구한말당시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대소관계의 급진전을 두고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우려도 대체로 구한말당시의 대러시아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오늘날의 한소관계가 1백년전의 조로관계와 어떤 유사성,차별성을 갖고 있는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움직임과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어떤 것인지를 짚어본다.【편집자주】
□참석자
신용하 <서울대교수ㆍ사회사>서울대교수ㆍ사회사>
윤병석 <인하대교수ㆍ한국사>인하대교수ㆍ한국사>
송병기 <단국대교수ㆍ한국사>단국대교수ㆍ한국사>
◇일시:6월6일
◇장소:한국일보 9층 소회의실
▲윤병석교수 (인하대ㆍ한국사)=우리나라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1860년대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러시아는 수백년만에 드디어 극동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며 당시 시베리아개척을 위해 중국인보다는 조선인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이때 이미 조선인의 이민이 시작됐습니다.
▲송병기교수 (단국대ㆍ한국사)=16세기에 극동진출을 시작한 러시아는 18세기중엽에 이르러 시베리아일대를 거의 차지합니다. 그러나 1850년대에 이르러 푸차친제독이 이끄는 이양선이 영흥만등 동해일대를 조사합니다. 결국 1860년 청나라와 북경조약을 체결,연해주를 차지하면서 우리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지요.
▲신용하교수 (서울대ㆍ사회사)=원래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발칸반도 진출을 꾀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저지로 크리미아전쟁(1854∼56)에서 패배,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극동에서 부동항을 찾기 위한 노력을 본격화했지요. 우리와의 접촉도 바로 그런 과정에서 시작됐습니다.
▲윤=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하고 극동함대를 창설하게 되는 데 그 배후지로서 시베리아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철도를 건설하고 농토를 개발하는데 조선인을 이용하게 됐지요. 러시아와의 초기관계는 바로 이같은 「개척이민」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송=접촉이 시작되자마자 러시아세력의 남하에 대한 우려가 대두했습니다. 고종 초년 대원군은 프랑스를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으로 청은 조선의 안전이 청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는데 이홍장은 이유원에 밀서를 보내 서구열강과의 조약체결로 러시아세력을 견제하도록 권고합니다.
1879년 일본의 유구병합으로 일본의 위협에 대한 우려가 무성했으나 1884년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까지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는 방아론이 조선의 정책을 지배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청의 권고에 따라 일본의 침략의사를 파악하기 위해 1880년 수신사로 건너간 김홍집이 들고 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인데 그 요지는 바로 「중국과 친하고 (친중국),일본과 손잡고(결일본),미국과 연대해(연미국),러시아를 막아야한다(방아)」는 것으로 특히 미국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그에 따라 미국과의 조약체결이 본격추진돼 1882년 조미수호조규가 체결되고 1883년에 영ㆍ독ㆍ이와도 조약을 체결합니다. 1882년에 조청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것과 1876년 일본과 체결한 조약을 합쳐 모든 주변세력과 수교를 했는데 유독 러시아만이 예외였습니다. 그러다 1884년 「균세지법」 즉 세력균형정책에 따라 러시아와도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본과 맺은 수동적인 조약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조약은 바로 세력균형정책의 결과였습니다.
▲송=러시아와의 수교는 「조선책략」에 기초한 조선외교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수정됐음을 의미합니다. 청은 그때까지도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주장했으며 조선이 열강과의 조약체결로 「속국」의 의미가 희석될까봐 고심했습니다.
그래서 조약체결시 조약문안에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기하거나 조선국왕이 일일이 속방조회를 보내도록 강요했습니다. 조선은 내심 이에 크게 반발했으며 청의 지긋지긋한 간섭을 받느니 차라리 그때까지 경계의 대상이던 러시아를 끌어들여서라도 청의 속박을 벗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와의 수교로 조선의 근대적 자주외교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러시아와의 수교는 민비와 그 측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청간섭배제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청은 대원군을 돌려보내 이들을 견제하는 등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이 때문에 러시아는 청일전쟁으로 청이 물러가기 전까지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청은 우려하던 러시아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세력에 의해 조선에서 구축되는 결과를 맞았지요. 청일전쟁의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하관) 조약으로 대만과 요동반도등을 일본이 획득하는데 러시아는 불ㆍ독과 함께 「3국간섭」을 통해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토록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러시아와 제휴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세력이 고개를 듭니다. 친로정책은 민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일본은 이 때문에 1895년 8월에 민비를 시해해버립니다.
1896년 민비시해와 단발령을 이유로 지방에서 의병이 궐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궁정시위대가 지방으로 출동한 사이 러시아공사관의 웨베르공사와 친로파들의 음모로 고종의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이뤄집니다.
▲송=그것을 친로파의 음모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신=그러나 한 나라의 왕이 다른나라의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일본의 손아귀로부터는 벗어났다고하나 이번에는 러시아의 독수에 걸려들어 각종 이권을 할양하게 되지요. 열강의 이권침탈이 대부분 아관파천기에 이뤄졌음은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윤=결국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동양의 강국으로 등장하고 조선을 장악하는동안 러시아는 연해주개발에 매달려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3국간섭을 계기로 러시아는 일본 세력을 일단 저지하고 아관파천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에서 일본과의 각축전을 전개하게 되지요.
▲송=크게보아 조선은 1894년까지는 청의 속박을 벗기위해,1895년 이후에는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강가운데 러시아를 제휴세력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윤=그러나 아관파천기에 우리나라는 근대화에 필수적이 주요자원을 송두리째 열강에 넘겨줘 자주적인 근대국가로 발전할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신=결국 당시의 역사는 자신의 힘에 바탕하지 않고는 어떤 세력균형정책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자강없는 세력균형은 외세에의 종속일수 밖에 없습니다.
아관파천기의 중요한 사건으로는 독립협회의 결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896년 7월에 결성된 독립협회는 자주적 수구세력과 연대해 1897년 2월에 고종을 환궁시키고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아관파천기간에 친로수구파 내각이 성립됐고 노한은행이 설립돼 중앙은행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 러시아 교관이 파견돼 러시아어로 군대를 훈련시키는등 대한제국은 압도적인 러시아의 영향력아래 들어갔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움직임중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만족하지 않고 부산의 절영도 (오늘의 영도)를 조차해 군사기지화하고 우리나라를 종속시키려는 기도를 합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러시아는 이를 포기하고 대신에 요동반도에 군사기지를 설치하는데 우리로서는 커다란 사건이었지요.
▲송=그 힘의 공백기를 틈타 일본은 대로전쟁준비를 위한 전국민동원체제를 갖추었으며 축적된 힘과 영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그 이후 한반도를 독점적인 영향력하에 두고 식민지지배를 가속화합니다.
▲신=되돌아보면 구한말당시 우리를 둘러싼 주세력은 청ㆍ일ㆍ로 3국이었는데 이들은 서로 조선을 종속시키려고 애썼습니다. 한편으로 미ㆍ독ㆍ불ㆍ영 등은 기회만 있으면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려 했지요.
그런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자신의 힘을 키우는데 주력하기보다는 외세를 이용해 외세를 막고자하는 균세에 매달려 있었고 그나마 효과적인 정책을 택했다기 보다는 그때그때 친청ㆍ친일ㆍ친로파가 대립,갈등했습니다. 생각할 수록 한스런 일이었지요.
제정러시아를 대체해 들어선 소련과 우리가 다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해방을 맞아서였습니다. 소련은 일본의 패망이 확실하게된 8월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38선이북으로 진주했습니다.
그에 앞서 이미 포츠담회담과 얄타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을 약속한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앞두고 서둘러 38선을 획정했었습니다.
▲송=구한말과 오늘의 상황이 평면적으로 비교될 수는 없겠지만 이미 북한을 영향력하에 두고 있는 소련이 이번 정상회담으로 남한에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것과 관련,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1백년전에 비해 우리의 국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너무 성급한 대소접근은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신=최근의 북방외교는 자체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한말의 균세정책과는 전연 성격이 다릅니다. 저는 특히 적극적인 대소접근이 경제적인 대일편향을 시정하는데도 커다란 성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소련은 소비재가 부족한 대신 첨단과학분야에서 우리에게 이전해줄 것이 많습니다. 기술이전에 인색한 일본을 대체하는 대상으로 소련은 아주 적합합니다. 또한 북한에 대한 영향력으로 보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의 평화정착이라는 값진 결실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정리=황영식기자>정리=황영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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