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파 「반미고수」에도 혁명 열기 “시들”/테헤란거리엔 팝송ㆍ청바지 다시 등장/성지건립공사도 한창… 순례객 줄이어4일은 이란의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하던 호메이니옹이 「모슬렘의 대부흥」을 보지못한채 「알라의 곁」으로 떠나간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79년 회교혁명으로 집권한 호메이니가 미국을 「악의 꽃」이라 저주,다음세기는 이슬람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역설하며 외세배격에 주력했지만 그의 사후 1년이 지난 오늘의 이란은 혁명의 열기가 식어가고 또다시 밀려오는 서방의 물결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테헤란주재 외교관들은 더이상 폐쇄와 통제가 이란사회를 지배할 수 없으며 개방화바람이 곧 불어닥칠 것이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젊은이들은 서슴없이 테헤란에 디스코테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자가용을 타면 으레 팝송을 즐겨듣는다고 털어놓는다.
운동을 하다말고 풍기단속 경찰이 오면 재빨리 차도르를 고쳐쓰는 여자들이 눈에 띄고 아예 청바지를 입고 차도르를 걸친 여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조짐과는 상관없이 「알라의 메신저」호메이니에 대한 이란국민들의 애정과 존경은 사후 1주기가 됐어도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테헤란시내 어디에서나 그의 초상화는 쉽게 눈에 띄며 또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나 순례객들로 붐비고 있다. 8년간 이라크에 대항해 「성전」을 치르는 동안 기꺼이 알라앞에 목숨을 바친 숱한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테헤란 남부외곽의 테헤란묘지에서 불과 5분여 거리에 있는 넓은 평원에는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7시에도 호메이니 성지를 건립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2년 계획의 대규모 성지가 아직 완공되지도 않았으나 호메이니 추모행렬은 전세버스를 타고온 중고생에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호메이니가 현대사의 중요한 한페이지를 장식한채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지 7일만에 가히 기적적으로 세워졌다는 이곳 호메이니 성지의 본당,높이 86m의 전형적인 회교 대사원형의 둥근 돔 한가운데에는 호메이니의 관이 놓여 있고 관주변에는 참배객들이 던져 놓은 지폐들이 마치 코란경전을 뜯어 흩어놓은 것처럼 쌓여 있다.
호메이니가 도덕적인 회교원리주의 국가의 실현을 위해 알라의 메시지를 이란인들에게 전하던 테헤란북부의 자마란사원과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9년간 머물렀던 숙소에도 이른 아침부터 순례객들의 흐느끼는 소리와 코란합창소리가 자마란뒤로 끝없이 펼쳐진 알보르즈산에 메아리지고 있다.
그가 생전에 거처하던 집과 연결해 놓은 40평 규모의 실내연설장에는 허름한 카펫이 바닥에 깔려 있고 2층 연단위에는 평소 그가 앉아 연설하던 흰천이 덮인 의자와 마이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벽전면에는 『나는 영원한 곳으로 간다… 그대들 진실한 신자가 되길 바란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옆에 걸려있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순례객들을 위로하고 있는 듯하다.
연단뒤 벽에는 조그만 출입문이 하나 있고 이문은 호메이니가 거처한 단촐한 단층집의 현관으로 이어진다.
이집은 생전의 그가 외국의 원수등을 접견하며 거처한 곳이다.
20세기의 역사적 인물중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호메이니의 생전의 거처는 단촐한 단층집에 불과,검소하게 살다간 혁명가 호메이니의 면모를 실감하게 했다.
이집을 관리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특히 외국의 방문객들이 호메이니가 이처럼 검박한 생활을 하다가 갔는가라는 질문을 자주하며 참으로 감동해마지 않는다』라고 자랑스레 들려준다.
그러나 알라의 곁에서 1년을 보낸 호메이니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오늘의 이란 모습을 어떤 심정으로 지켜볼지 궁금하다.【테헤란=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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