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보셨던 고통”에 놀라/일제 36년이 「맛」이었나/말 몇마디로 안풀릴바엔 이제 실속을「언어」에 대한 논란이 일고있다.
우리나라 국빈의 방일을 맞아,일본 정상측이 어떤 내용의 말로 과거사를 사죄하느냐는데,그 논란의 초점이 모아져온 것이다.
말 몇마디 쯤으로 지난 날의 허물이 모두 가려진다면야 그보다 반갑고 손쉬운 일도 없을법한데 이렇게 간단한 일이 어째서 두나라 매스컴이 총동원 되다시피해 시끄럽게 됐는지 「말에 종사하는」작가로 심히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설령 갖은 말로 사죄해온다 치더라도 몇마디 말마디쯤으로 우리나라가 그 황금같은 최근세에 일본으로 인하여 겪은 엄청난 손실과 고통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는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기야 「언어는 사상의 그릇」이라고한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도 있었으니까,「의사교환」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외교에 있어서 그 전제가 되는 것이 「언어」라는 바구니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이 기왕 이렇게 되고보니 실은 이쯤에서 한일 두나라 사이의 감정의 응어리가 분명히 청산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란 것은 나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둡고 괴로운 유산을 우리 자식들에게 까지 내리 상속하고 싶지는 않은 까닭이다.
과연,일본 왕은 사과를 했다.
우리 정부당국자의 코멘트에 의하면 「지난 날의 잘못된 과거가 일본의 행위에 의해 초래됐다는 것을 인정하고,우리국민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사과반성한 것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시하지 않았던,지난날의 두루뭉수리 표현에 비기면 한결 진전된 문맥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원문을 접하고 나서 질겁한 것은,그야말로 그중의 「단한마디」탓이었다. 지극히 짧되 지극히 충격을 안겨주는 그 한 표현.
문제가 되는 핵심문장을 직역해서 소개해 보자.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한 시기에 귀국의 사람들이 맛보셨던 고통을 생각하고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습니다』
「통석」이라는 단어를 두고 의견이 구구한 것 같은데,여기에는 「심히 유감스럽다」 또는 「심히 아쉽다」는 뜻이 포함되어있으나 진정한 사과발언으로 보기는 어렵다.
더욱 납득키 어려운 것은 이보다는 그 앞의 「맛보셨던」(미□□□ㆍ아지와와레타)이라는 말마디다.
일본으로 인해 36년간 강점당한 고통과 손실이 우리에게 있어서 한낱 「맛」이었던가. 이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용구다.
단순한 개개인간의 회화의 경우라 할지라도 이같은 언어구사행위는 생각하기 어렵다. 하물며 쉼표 마침표 하나하나에도 보살핌이 요구되는 외교문서상의 용문에 있어서야 말할나위도 없을 것이다.
「아지」(미)라는 말을 일본사전 「광사원」에서 찾아보자.
『①음식물이 혀의 미각신경에 닿았을 때 일어나는 감각 ②체험에 의해 알게된 느낌 ③(씹어서 알게되는 것 같은)사물의 행태,재미 ④(약간 색다른)쾌감 ⑤솜씨 좋은…』
따라서 「이지와우」라는 동사는 「맛보다」 「알게되다」 「(쾌감을)곱씹다」 등등으로 옮겨진다. 물론,이것은 흔히는 「체험하다」라는 뜻으로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해서 생각해봐다 우리가 식민지시대에 겪은 가지가지 수모와 고통은 「체험」을 넘어서는 「환란」이었지,「맛」이나 「느낌」이나 「재미」나 「쾌감」은 결단코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용문이 가능한지 이 세계에 둘도 없은,「한ㆍ일간」이라는 국제관계의 불가사의성을 새삼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우리정부당국자는 「겪으셨던」으로 확대번역하여 황황히 받아들였다.
이 또한 납득키 어려운 처사다. 사물을,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는 시대는 아니지 않는가.
사실은 사실대로 알려야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고,그 지점에서 전향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비로소 건강한 미래는 약속되는 것이다.
『한마디말로 천냥빚을 갚는다』라는 어이없는 속담이 우리나라엔 있다. 실속없이 명분에 얽매어 공리공론에 매몰되기 쉬운 민족성을 지적한 예리한 표현이다.
일본은 「한마디 말로 천냥빚을 갚는」이 기막힌 기회를 놓친 셈이다. 이쯤에서의 결산이,세계경제의 하이톱에 서게된 일본에게 얼마만한 국익으로 작용할 것인가를 헤아리면 참으로 「통석의염」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도 이쯤에서 정녕 이 실속없는 공리공론의 늪에서 헤어나가야겠다고 여겨진다.
실속없는 입씨름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우리도 좀 실속을 차리자. (여류작가ㆍ「또하나의 만엽집」 「침사의 비밀」등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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