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ㆍ재계실력자… 65년 국교재개때도 깊숙이 관여/태평양전쟁참전 군출신… 소설 「불모지대」 주인공「일왕사과」 문제로 22일 한국에 밀파된 세지마ㆍ류조(뇌도용삼ㆍ79)씨는 지난 65년 한일국교정상화 막후협상에 관여한 이래 한일간현안 타결이 막바지에 이를 때마다 해결사역할도 나섰던 일본정재계의 막후실력자.
한일국교정상화 협상당시 「김종필오히라」 회담이 공식채널이었다면 세지마는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막후 상대역이었다는 것이다. 82년 양국최대 현안이었던 한일 경제협력 문제타결을 위해 김해공항을 통해 은밀히 방한,권익현당시 민정당대표위원과 비밀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1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김종필ㆍ박태준민자당최고위원과 권익현씨와 교분이 두터우며 고 이병철삼성회장과도 친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현재 종합상사 이토추(이등충)의 특별고문이고 동경상공회의소 부회두인 직함만으로 본다면 경제인으로 치부될 수 있으나,총리가 임명한 「신행정개혁 심의위원회」및 「행ㆍ재정개혁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어 21세기 일본정부의 행정구조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있는 셈이다.
원래 군인출신인 그에게는 「천의 얼굴」이 있는데,일관하게 흐르는 것은 구제국군시대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확고한 국가관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내에서 정ㆍ재계는 물론 젊은이들로 부터도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는 특이한 존재이다.
1911년 도야먀(부산)현 오야베(소시부) 출신인 그는 동경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가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쳤다.
두뇌가 명석했던 탓에 지휘관보다는 참모로서 활약했던 그는 41년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에는 동경의 대본영에서 육군및 해군참모로서 전쟁 수행에 한몫.
패전 한달 전인 45년 7월,그는 만주주둔 관동군총사령부의 요청으로 참모로 부임했는데 당시 그의 계급은 중좌(중령). 이해 9월6일부터 11년간 소련군의 포로로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한 그는 포로생활중 동경재판의 증인으로 출석차 일본에 불려오기도 했다.
세지마가 완전 귀국한 것은 56년8월. 그는 2년간의 사회적응 기간을 거쳐 샐러리맨으로 변신했다. 58년 47세의 나이로 이토추상사에 입사,업무부장이 된 그는 명석한 두뇌와 군대시절의 인맥을 활용,이토추 제일의 인물로 부상했다.
78년 회장이 된 세지마는 이토추를 일본에서 굴지의 종합상사로 키워냈다.
그는 특히 군대시절 참모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이토추상사는 지금도 일본제일의 정보회사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정보는 오일 쇼크때 일본이 효율적으로 대처하는데 단단히 한몫을 해냈다.
세지마는 다나카정권당시 미군기 그라만의 일본도입을 둘러싸고 잡음에 관련돼 검찰에 소환된 적도 있었지만 깨끗한 사생활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지난 81년 회장직을 그만두고 특별고문으로 물러앉은 그는 나카소네 (중회근)전 총리와는 특별히 가까웠던 사이로 얘기되고 있다.
세지마의 이같은 「전설」은 일본의 유명한 여류작가 야마자키 도요코(산기풍자)가 쓴 「불모지대」라는 소설이 돼 베스크셀러가 됐고 TV연속극으로도 방영돼 시청률 제1위를 기록한 바 있다.【동경=정훈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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